불후의 명수필

바다엽신/李外秀

如岡園 2013. 3. 15. 21:22

     바다엽신

 

 누군가는 고독을 질겅질겅 씹으며 산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독을 외출복처럼 갈아입으며 산다고 했다. 무슨 상관이랴.

 고독이 달밝은 밤에 보초 서는 흑인 병사의 어금니에 질겅질겅 씹히는 츄잉검이건 여름 방학에 여행을 떠나는 재벌의 바람기 있는 외동딸 미니 스커트이건 무슨 상관이랴.

 지금 비내리는 바다에 와 있다. 내가 무슨 마도로스라고 날마다 그토록 바다를 그리워하였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조차도 없는 바다를.

 당신은 들리는가.

 비는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한 번도 말 붙이지 못하고 애태우던 여자애의 음성, 아니면 당신이 밤을 새워 쓰던 편지의 활자들이 이제야 다시 그대 주변으로 돌아와 떨어지는 소리다.

 소리는 곧 아픔이다. 양철 지붕 가득히 흩어지는 불면의 낱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다.

 당신은 비오는 날의 저문 거리에서 한 사람의 낙오된 유목민처럼 아주 외로운 사람이 되어 오래도록 우산도 없이 홀로 걸어 본 적이 있는가.

 호주머니 속에서 당신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갈 시내버스 요금밖에는 없고. 그리하여 다실의 흐린 조명등 밑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베에토벤의 침울한 육성을 들으며 쉴 수조차도 없었던 날, 정답던 친구 몇 명은 저희들끼리 바다로 떠나고 더구나 잠시 사귀던 애인마저 출타하고 없을 때 당신이 그 무엇을 만나게 되는 것은 오직 명료한 고독뿐임을.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보아야 당신 홀로 기거하는 방안 가득 더욱 감당할 수 없는 고독이 자욱한 빗소리로 누적되어 있을 터이고, 그래서 당신은 차라리 거리에 머물러 좀더 비를 맞을 작정을 하게 되리라.

 점차로 당신의 어깨는 젖어들고 통속한 유행가조차도 눈물겹게 들리면 문득 당신은 회상하게 되리라.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이름들을.

 그렇다. 진실로 우리가 망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 오는 동안 잠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가슴 속 저 알 수 없는 깊이에 방치해 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홀로 쓰라림을 맛보는 시간에 새삼스럽게 찾아내어 보게 될 뿐이다.

 여기는 바다. 오늘은 종일토록 비가 내렸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저 문명의 거리에서 시달리며 내가 보낸 나날, 소설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막걸리 국물로 얼룩진 작업복을 걸친 채 비틀거리며 살아 온 나날, 내가 경영한 자학이며 방황이며 빌어먹을 울분들을.

 정말이지 나는 어금니가 부러질 지경으로 고독을 모질게 씹다가, 그 저주스러운 고독에서 헤어나기 위해 바다로 왔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나는 비 내리는 이 유월의 텅 빈 백사장에서 더 큰 고독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가 저 문명의 거리에서 생각했던 고독은 한갓 사치일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만나는 이 엄청난 고독을 어떻게 표현하랴. 그러나 차라리 다행한 것은 바다에 찾아와 내가 맛본 것이 고작 몇 모금의 소금물이 아니라 바로 나를 자살시켜 버릴 듯한 고독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못 느끼면 나는 플라스틱 제품의 인간으로 끝장이 나고 마니까.  (李外秀 에세이. '영혼의 변주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