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하여
어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서는 신을 경외할 것과 아낌없이 남에게 봉사할 것,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생각조차 삼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부유한 생활에 탐닉하지 말고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배웠다.
아폴로니우스에게서
아폴로니우스(스토아 학파 철학자)에게서는 독립심을 가질 것과 절대로 요행에 의지하지 말며, 비록 한 순간이라도 이성(理性)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 것을 배웠다. 그리고 몹시 괴로운 가운데서도, 가령 자식을 잃었을 때나 오랫 동안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를 취하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같은 인간이 어느 한 곳에서는 부드러울 수도 있다는 산 실례를 통하여 그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남에게 이치를 설명할 때 성급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으며, 철학적인 원리를 남에게 전하는 데 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것을 자기 재능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친구의 신세를 질 때 비굴해지거나 반대로 냉정하게 무시하지 않고 그 호의를 잘 받아들이는 태도도 그에게서 배웠다.
섹스투스에게서
섹스투스(카이로네이아의 스토아 학파 철학자)에게서는 남에게 친절할 것과 아버지다운 인자한 태도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의 본보기와 자연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웠다. 또한 허세를 부리지 않는 위엄과 친구에 대한 셈세한 우정과, 무지한 자와 분별이 없는 자에 대한 인내를 배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적절히 대하는 법도 배웠다. 그리하여 그와 어울리는 것은 다른 어떤 사귐보다도 즐거웠으며, 그때 사람들은 그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인생에 필요한 신조(信條)를 찾아내어 이것을 적당히 분류하는 데 뛰어난 방법과 이해력을 보여 주었다.
그는 분노나 그밖의 걱정을 전혀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정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애정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남을 칭찬해도 지나치게 하지 않고,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카툴루스에게서
카툴루스(스토아 학파 철학자)에게서는 친구가 항의를 할 경우에, 비록 그것이 터무니없는 항의일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그와 한평생 우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도미티우스(외가 쪽 조부의 한 사람)와 아테노투스(프론토의 스승) 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승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찬양하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과 자기 자녀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형제 세웨르투스에게서
나의 형제 세웨르투스에게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 정의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또한 그를 통하여 트라세아, 헬리디우스, 카토, 디온, 브루투스(모두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만민을 하나의 법률 아래에 두고, 평등한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하여 국민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존중하는 주권을 지닌 정치 체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그에게서 철학을 언제나 변함없이 존중하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며, 없는 자를 자진하여 돕는 것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책망해야 할 사람들에게 솔직이 자기 견해를 말하고 또한 친구들이 '저 녀석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추측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일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의 養父 안토니누스 피우스. 로마 황제. 서기 138~161 재위)에게서는 온화하면서도 깊이 생각한 끝에 일단 결단을 내린 일은 끝까지 수행하는 인품을 배웠다. 그리고 명예를 얻으려는 헛된 허영심을 품지 말고 노동을 사랑하는 마음과 강한 끈기를 가져야 하며, 공익을 위해 충언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각각 그 공적에 따라 대우하고, 긴장할 때와 긴장을 풀 때를 경험에 의해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소년들에 대한 연애를 금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공공정신(公共精神)이 투철했다. 친구들에게 식사를 함께 하자고 강요하지 않고, 또 억지로 여행에 따라나설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어떤 용무로 곁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면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또한 그는 나라일을 심의할 때 철저히 검토하였으며 끈덕지게 추구하여, 안이하게 만족하거나 적당히 이야기를 마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친구와의 사이에 권태를 느끼거나 지나치게 열중하지 않고 꾸준히 우정을 유지해 나갔으며 언제나 만족스러워하고 명랑했다. 먼 장래를 내다보고 사소한 일에도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며 결코 비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값싼 갈채나 아첨을 당장 가려냈으며, 제국의 통치에 대해 주야로 심려하고 그 재정을 관리하며 여기서 일어나는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신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고 인간에게는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아첨하지 않고 모든 일을 진지하고 착실하게 처리하며 결코 비속(卑俗)에 흐르지 않고 호기심에 끌리지 않았다.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 -운명은 그에게 그것을 풍부하게 제공했지만- 을 자랑하지 않고 미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즐기고 없을 때에는 별로 탐내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를 궤변가(詭辯家)라든지 경박한 인간이라든지 현학자(衒學者)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그분이야말로 분별 있는 완전한 인간으로 남의 아첨에 귀를 그울이지 않고 자기와 남의 일을 훌륭히 처리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들을 존경하고, 사이비 철학자에 대하여 비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미혹되지도 않았다. 그는 사교성이 있고, 조금도 무뚝뚝하지 않으며 점잖았다. 자신의 육신에 대해 절제를 하였는데 그것은 삶에 집착하는 인간으로서나 개인적인 체면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전혀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는 좀처럼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웅변이나 법률, 윤리 그 밖의 분야에 전문 지식이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시기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재능에 합당한 명성을 얻게 한 것이었다.
그는 조상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이것을 남에게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한 곳에 지긋이 머물러 있지 못해서 언제나 돌아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같은 장소에 머물러 같은 일에 종사하였다. 두통이 심한 발작을 일을킬 경우에도 곧 원기를 회복하고 평소의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많은 비밀을 갖지 않았으며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적고 또 극히 드문 일이었고 그것도 정치에 관계되는 것 뿐이었다.
축전(祝典)의 관리, 건물의 신축, 하사품의 분배, 그밖에 이와 비슷한 일을 할 경우에도 신중하고 절도가 있었다. 이 경우에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만 주력하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명예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욕하는 일이 없었고, 새 집을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음식물이나 옷, 옷감이나 색깔 등에 관심이 없었고, 노예의 용모에 개의치 않았다. 그의 토가[예복]는 별장이 있는 해안 지방인 로리움(라티움의 변경에 있는 小邑. 마르쿠스는 이 별장에서 가끔 머물렀으며 서기 161년 이곳에서 죽었다)에서 가져왔고 일상용품은 라누위움(라티움의 거리. 로마의 동남쪽에 있다)에서 가져왔다. 투스쿠룸(라티움의 거리)의 세무 관리가 그에게 탄원했을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했던가?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그에게는 사납거나 무자비하거나 난폭한 면이 없었으며 이른바 상대방을 진땀나게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는 듯이 모든 일을 조용히 질서 정연하게 정력적으로 끈질기게 검토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크세노폰 참조)는 그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약해서 절제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향락에 빠지는 일들을 절제해야 할 때에는 절제하고 즐길 만한 때에는 즐겼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끈기 있게 절도를 지킨다는 것은 완숙하고 불굴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의 특징인데(마지막 병을 앓을 때의 그의 태도가 그러했다) 그가 그 하나의 본보기이다.
신들에게서
나는 훌륭한 조상들을 갖게 되고 훌륭한 아버지와 훌륭한 자매(안니아 토루니피키아), 훌륭한 스승, 훌륭한 동료, 친척, 친구들-이들은 대부분이 선량한 사람들이었다-을 갖게 되었으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잘못을 저지를 성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들의 은혜로 이런 시련을 당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부의 소실 곁에서 너무 오래 양육되지 않고 내 청춘을 순결하게 유지하며, 일찍 동정(童貞)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시기를 늦추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또한 통치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는 나의 모든 자존심을 제거해 주고 궁정에서 살기는 해도 호위병이나 화려한 옷이나 횃불이나 동상, 그밖에 이런 종류의 사치품을 탐내지 않고 살아가는 슬기를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 평민의 수준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때문에 비속해지거나 국가를 위해 수행해야 할 통치자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훌륭한 동생(루키우스 베루스. 마르쿠스의 義弟. 그 행실은 결코 남의 본이 되지 못했다)을 갖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는 착한 성품으로 조심스럽게 나에게 반성하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동시에 존경과 애정으로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내 자식들(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 사이에는 3남 3녀 또는 4녀?가 있었다. 아들 둘은 일찍 죽고 나머지 콤모두스가 마르쿠스의 뒤를 이었다)이 바보나 신체적 불구자가 아닌 것을 신들에게 감사하고, 또 내가 수사학이나 시학이나 그밖의 학문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만일 내가 이 방면들에 깊이 들어섰더라면 나는 아마도 거기에 전념했을 것이다. 또한 나의 가정 교사들을 서둘러 그들이 원하는 높은 지위에 앉개 해준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당시에 아직 젊었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지위를 주리라는 희망에 매어 있지 않게 되었다. 또한 내가 아폴로니우스, 루스티쿠스, 막시무스를 알게 되고,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어 그것을 자주 실감하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신들과 신들의 은총, 도움, 영감에 의지하는 한, 내가 자연에 합당한 생활을 즉시 시작하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잘못이며 신들로부터의 암시, 아니 거의 교시(敎示)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육신이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또한 나는 베네딕타(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첩)나 테오도투스(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시녀)와 접촉한 적이 없고, 후에 뜨거운 연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지만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을 신들에게 감사하며, 가끔 투스티쿠스를 골려 주었으나 그 후에 다시는 그런 후회할 짓을 하지 않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하고, 나의 어머니(도미티아 루키라. 서기 156년에 50세로 죽었다)는 젊었을 때 죽을 운명에 빠졌었지만 만년을 나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돈에 궁한 자나 그밖에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했을 때마다 나에게는 이에 필요한 돈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고, 한편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곤궁에 처한 적이 없었던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또한 온순하고 상냥하며 순박한 여자를 아내(파우스티나. 그녀에 대해서는 不貞한 아내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전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다)로 삼게 된 것과 내 자녀들을 위한 훌륭한 교사를 무난히 찾아내게 한 것을 감사한다.
꿈(신이 꿈을 통해 사람에게 처방을 알려 준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이었다)을 통하여 여러가지 약을 계시하여 준 것을, 특히 각혈과 현기증에 대한 약을 마련해 준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 카이에테(라티움의 연안에 있는 도시)에서 받은 일종의 신탁(神託)을, 또한 철학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궤변가에게 말려들지 않고, 논문을 쓰기 위해 시간을 보내거나 삼단논법(三段論法)을 분석하거나 천체를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지 않게 된 것을 신들에게 감사한다.
이 모든 일들은 신들의 행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라누아 강기슭, 콰디 족의 마을에서 씀)
*그라누아 강은 다뉴브 강의 지류로 콰디인들은 그라누아 강의 서방(오늘의 체코슬라바키아)에 살고 있던 게르만민족의 일부였다. 마르쿠스는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원정왔을 때 이 장(章)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