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사월 파일의 풍속

如岡園 2013. 5. 20. 23:04

          # 사월 파일(四月 八日)의 풍속

 이 날 손님을 청해다가 음식을 대접하는데 느티떡, 볶은 콩, 삶은 미나리 등을 내놓는다. 이를 '부처님 생신날 소밥(고기반찬이 없는 밥)'이라 한다.

 또 어린이들이 동이에 물을 등대[燈竿] 아래 떠다 놓는다. 그리고 바가지를 엎어 놓고 빗자루로 그 바가지의 등을 두드려 소박한 소리를 낸다. 이를 수고(水鼓;水缶,물장구)라고 한다.

 생각컨대 장원(張遠)의 <오志>에, '서울 풍속에 부처의 이름을 외는 사람은 모두 콩으로써 그 수를 헤아렸다가 4월 8일 석가의 탄신일에 이르러 소금을 살짝 뿌려 그 콩을 볶아서 사람을 길에서 맞이해다가 먹게 함으로써 인연을 맺는다.'했다. 지금 풍속에 콩을 볶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생각컨대 <帝京景物略>에 '정월 보름날 밤 어린이들이 북을 치며 저녁부터 새벽까지 보내는 것을 태평고(太平鼓)라고 한다.'고 했다. 지금 풍속의 수고(水鼓)가 곧 태평고와 같은데 부처 생신날이 등석(燈夕)이므로 옮겨온 것이다.

 인가에서는 자녀의 수대로 등을 켜는데 밝아야 길하다. 등대[燈竿]는 큰 대나무 수십 개를 이어 만드는데 사치를 부리는 사람은 오강(五江)의 돛대를 실어다가 만들고 꼭대기에는 꿩의 털을 꽂고 각색 깃발을 매어단다. 혹 일월권(日月圈)을 꽂아 바람에 따라 눈이 부시게 돌게도 한다. 종로 네거리의 여러 가게에서도 높고 큰 것을 숭상하여 수십 개의 줄을 펼쳐 놓고 '어기어차' 하며 끌어 올려 세운다. 이 때 키가 작은 사람을 남들은 비웃는다.

 이 날은 예에 따라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이 등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남산, 북악산 기슭으로 올라가 널렸고 혹 어떤 이는 퉁소와 북을 가지고 시가를 따라 멋대로 구경하기도 한다. 

 생각컨대 <高麗史>에, '왕궁이 있는 국도(國都)로부터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날 이틀 동안 연등(燃燈)을 했었다. 그러나 최이(崔怡)가 4월 8일에 연등을 하도록 했다.'고 하였다.

 또 생각컨대 <고려사>에, '우리 나라 풍속에 4월 8일이 석가의 탄신일이므로 집집마다 연등을 하는데 이날이 되기 수십 일 전부터 여러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 등대에 매달아 기를 만들고 두루 장안의 거리를 누비면서 쌀이나 돈을 요구하여 그 비용을 삼으니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고 했다.

 지금 풍속에 등대에 깃발을 다는 것이 이 호기의 남은 풍속이다.

 등의 이름으로는 마늘등, 연꽃등, 수박등, 학등, 잉어등, 자라등, 병등, 항아리등, 배등, 북등, 칠성등, 수자등(壽字燈) 등이 있는데 모두 그 물건의 모양을 본떴고 종이를 바르거나 푸른 비단으로 만들어 운모(雲母)를 끼워 비선(飛仙), 화조(花鳥)를 장식한다.

 북등에는 대개 삼국(三國;중국의 3국)의 고사를 그렸다. 또 영등(影燈)이 있는데 선기(旋機;갈이틀)를 만들어 넣는다. 그리고 종이를 잘라 말 타고 사냥하는 모습이나 매, 개, 범, 사슴, 꿩, 토끼 모양을 그려 그 선기에 붙여 바람에 빙빙 돌게 해서 밖에서 그 그림을 본다.

 생각컨대 소동파(蘇東坡)의 <與吳君采書>에 '영등(影燈)을 아직껏 못 보다가 이제 보니 어떤가? 한 번 보매 <三國志>같은가?' 했다. 이는 삼국의 고사를 그림자로 만든 것이다.

 또 범석호(范石湖; 范成大)의 <上元紀吳中節物俳諧詩>에 '그림자를 회전시키니 탄 말이 종횡으로 달린다.'한 싯귀의 주(註)에 '마기등(馬騎燈)'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송나라 때 이미 이런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京都雜志>

 

京都雜志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지. 실학자 유득공이 지었다. 2권 1책 필사본. 완성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같은 세시기인 <열陽歲時記>, <東國歲時記>보다 먼저 집필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풍속과 세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이며 특히 우리나라 민속학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다. 1911년 광문회에서 최남선이 동국세시기를 간행할 때 열양세시기와 이 책을 합편하여 펴낸 바 있고, 1969년 을유문화사에서 위의 세 책을 합편하여 이름을 <東國歲時記(外)>라 하고 이석호가 국역하여 문고판으로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