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심리학

초자아의 공격-수치심/수치심이 일을 방해한다(1)

如岡園 2014. 8. 11. 11:51

수치심이 일을 방해한다

 

     초자아의 재검토

 수치는 언제나 초자아와 자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초자아와 자아의 불균형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초자아가 너무 높은 경우이다. 자아의 힘(재능)은 보통인데 이상은 너무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아 수치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때가 그것이다.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기품이 높은 양친 슬하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이런 타입이 많다. 이렇다 할 능력도 없으면서 기품만 높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초자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본인은 항상 수치스러운 생각을 갖게 된다.

 또 하나의 경우는, 초자아는 보통인데 자아(재능)가 너무 미약한 경우이다. 이상은 그리 높다는 것은 아닌데 능력이 너무 모자라서 능력이 너무나 모자라기 때문에 보통의 초자아의 요구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해 수치스러운 생각을 언제나 하게 된다.

 학교에서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조차도 잘 할 수 없으므로 남부끄러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자라는 아이가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명한 것이지만, 어떻게 하든 보통 수준의 것은 할 수 있도록 자아를 끌어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수치는 자연히 적어진다.

 초자아가 높으므로 해서 항상 지나치게 수치심이 강해져 자유로이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학생시절에 관리가 지망이었던 사람이 성적이 뛰어나지를 못해서 관리로는 채용되지 못하고 어줍잖은 회사에 취직하였지만 그의 마음의 깊은 바닥에는 관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관리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겠고 또 직장를 바꿔본댔자 그의 초자아를 만족시킬 것이 못된다면 도리어 마이너스가 된다. 오히려 초자아 자체의 성질이 문제인고로 지나치게 높은 초자아를 잘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초자아는 관리가 되어 권위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자아에 요구한다. 관리가 되어 뽐내고 싶어하는 소박한 권위욕은 봉건적 색채가 강한 환경 밑에서 자란 대개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지금까지는 이 권위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초자아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고 그것에 반하는 것이 수치의 원인이어서 이런 사고 방식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생활에서 보아서 이러한 사고 방식이 합당치 않을 경우는 지금까지 가치를 인정해 온 초자아의 생태를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관리가 되어 존경받고 싶다라든가 혹은 뽑내고 싶다라고 하는 것에 최대의 가치를 둔 것으로부터 비록 일상의 일에서는 그다지 존경도 못받고 뽐내지도 못하지만 일에 온 정력을 기울이면 인정받게 되어 지위도 차츰 오를 수가 있고 그 분야에서 성공을 할 수도 있다. 매일의 생활에서 초자아를 작게 만족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상 생활은 자기 부정의 연속일지라도 장래에 꿈을 두는 것으로써 초자아를 만족시키는 따위로 초자아의 생태를 수정하는 것이 긴요하다.

 

     수치는 가르쳐 준 감정

 사람에 따라서 수치를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옛날의 상인처럼, 초등학교를 나오면 곧장 점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훈련받은 상인은 돈벌이 때문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소위 양반 출신으로 할수없이 장삿군으로 된 사람은 손님이 오드라도 잘 접대를 하거나 머리를 숙일 수가 없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시험의 성적이 나쁘드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부끄러워서 못견디는 학생도 있다.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을 수줍어하는 아이도 있고, 남의 앞에 나서고 싶어 못견디는 아이도 있다.

 세일즈맨이나 보험회사의 외무원이라는 직업이 수치스러워 못견디는 사람도 있고, 이런 직업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와같이 사람에 따라서 수치를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은, 수치는 남이 가르쳐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초에는 양친의 가르침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다음으로 가족, 학교, 사회, 그밖의 환경, 시대가 영향을 미친다.

 돈벌이에 조금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 상인은 돈벌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돈벌이에 몰념할 것을 환경으로부터 철저히 훈련받기 때문에 돈벌이만이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무사는 어릴 때부터 돈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 상인이라는 계급은 최저의 것이라고 하는 교육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돈벌이라든가 장사라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워서 못견딘다.

 학교의 성적에 마음을 쓰는 아이는 부모로부터 항상 공부해라, 공부해야한다라고 귀찮을 만큼 말을 들어오고, 성적이 나쁘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는 식으로 교육받아 왔고, 성적에 마음을 쓰지 않는 아이는 그처럼 엄격한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치의 원형(原型)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교육에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래서 어릴 때 뿌리 박힌 수치는 '세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나이가 수십 살이 되드라도 어릴 때의 수치를 느끼는 방식이 습관(조건반사)으로 되어버려서 그저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예가 실로 많다.

 

     지난 시대의 수치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타인으로부터 조그마한 호의를 받더라도 사양하고 지나치게 결백할 정도로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도리어 친구 친지들로부터 사귀기 힘든 사람이라고 경원당하게 된다.

 초등학교 학생일 때 상급반의 사내아이로부터 이상한 장난을 당한 20대 후반의 어떤 여성은 그때의 부끄러운 생각이 항상 강하게 남아 있어서 지금도 손위의 남성에 강한 수치심을 느껴 결혼하지 못한다.

 이와같이 어릴 때의 수치의 원형은 일세기 전 혹은 그 이전의 봉건시대의 윤리나 습관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이 수치를 느끼는 방식이 전시대의 양반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 있다. 지금도 저놈은 '양반'이라고 한다든가,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이 잘 쓰여지고 있는 것은 전시대의 윤리관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과 다름 없다.

 세일즈맨의 일이 부끄럽고, 상인이 천하고,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감정의 대부분은 전시대의 유물이며, 그것이 과학과 경제가 진보한 현대에 있어서도 아직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행동을 대단히 저해한다.

 어쨌든 수치라고 하는 감정은 어릴 때의 것이 무비판적으로 되풀이되기가 일쑤고, 전시대의 유물이 지금도 아직 활개치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어긋남을 바로잡아 현실에 맞는 것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