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월단(月旦)/만가(輓歌)/세군(細君)

如岡園 2015. 2. 1. 21:06

          # 월단(月旦)

 매월 초하룻날(月旦) 인물을 비평한 고사로 말미암아 인물평을 월단평(月旦評)이라 하거니와 줄여서 월단이라고도 한다.

 후한(後漢, 25~220)도 전한과 마찬가지로 외척과 환관의 횡포가 심하였다. 환관이 결속하여 절개있는 선비 2백여명을 죽인 전당고의 화(前黨錮之禍)에 이어 7백여 명을 죽인 후당고의 화(後黨錮之禍) 등, 정치가 이처럼 어지럽고 보니 태펑도(太平道)라는 사교(邪敎)가 유행하였다. 그러자 그 교주인 장각(張角)이 수십만의 신도를 이끌고 천하를 잡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표지가 노란 수건이었기에 그들을 황건적(黃巾賊), 그 난리를 황건란(黃巾亂)이라 한다. 그 황건적을 무찌른 데 공이 큰 조조(曹操)는 젊어서부터 명인 기질로서 가사를 돌보지 않고 호걸들과의 교제에 신명을 내는 터였다.

 그 무렵 하남성(河南省)의 여남(汝南)이라는 곳에 허소(許소)라는 이와 종형인 청(靖)이라는 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월 초하룻날 인물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하여 '여남(汝南)의 월단평(月旦評)'이라면 유명했다. 그 소문을 듣고 조조도 허소를 찾아갔다.

 "나는 어떤 인물인지 비평해 주시오".

 난폭한 조조인지라 허소는 선뜻 말을 못하다가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료에 불과하거니와 난세에 있어서는 능히 간웅(姦雄)이 되실 인물이올시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기뻐하여 비로소 황건적을 칠 결심을 하였다. 그때 조조가 허소를 찾아가지 않았거나 허소가 그런 인물평을 내리지 않았던들 <삼국지>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다.

 

          # 만가(輓歌)

 영구차(靈柩車)를 이끌며 부르는 노래.

 한의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고조(高祖)로서 등극했을 때였다. 일찌기 한신(韓信)의 급습을 받고 화목사(和睦使)를 쪄 죽였던 제(齊)나라 왕 전횡(田橫)은 고조가 등극하자 보복이 두려워서 부하 5백여 명을 이끌고 섬으로 도망쳤다.

 고조는 전횡의 후환이 두려워 죄를 용서할 테니 오라고 청하였다. 전횡은 낙양까지 3백리를 앞두고,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길 것이 수치스러워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 목을 고조에게 바친 두 나그네도 전횡의 무덤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섬에 남아 있던 5백 여명 역시 전횡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모조리 자결하였다. 

 이윽고 무제(武帝)의 시대로 옮겨지자 무제는 악부(樂府)라고 하는 음악원을 만드니 그 곳의 총수인 이연년(李延年)이 지난 날 전횡의 제자가 지은 상가(喪歌)에다 곡조를 붙여 영구(靈柩)를 이끌며 부르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만가(輓歌)'라고 일컫게 되었다.

 

          # 세군(細君)

 자기의 아내 혹은 남의 아내. 본래 제후(諸侯)의 부인을 일컫는 소군(小君)에서 온 말.

 전한(前漢) 무제(武帝)적의 익살맞은 신하 동방삭(東方朔)의 말에 유래하므로 천 7백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무제는 등극하자 널리 천하에서 유능한 인재를 구했거니와 그 때 제(齊, 山東)나라 사람 동방삭이 자신을 추천하는 글을 올렸다.

 종이가 없던 시대였기에 댓조각으로 무려 3천장- 무제는 한 장 한 장 읽어나아가기를 두 달, 당당한 문장이었다. 무제는 그를 불러 낭(郎)에 임명하였다. 

 동방삭은 박식하고 재치가 있어 곧잘 무제의 말벗이 되었다. 그런데 무제 앞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고기를 주머니에 넣어 아내에게 갖다 주곤 하였다.

 삼복(三伏)에는 황제가 정신(廷臣)들에게 고기를 베푸는 풍습이었는데 고기는 준비되었는데 정작 분배할 관리가 나타나지 않는 중에 동방삭은 제 칼을 뽑아서 베어 가지고 돌아가버렸다. 나중에 무제가 알게 되어 그를 힐책하자,

 "네! 칼을 뽑아 고기를 벤다는 건 무척이나 장렬한 노릇이던뎁쇼. 베긴 베되 조금만 베었으니 이 또한 청렴하지 않습니까요. 그것도, 고기를 갖다가 아내(細君)를 주었으니 거 오죽이나 정다운 마음씨냐 말씀이야요, 네......"

 무제는 너털웃음을 웃고 술 한 섬과 고기 백 근을 베풀며 말하였다. 

 "가지고 가서 부인(細君)을 섬기게나."

 '소군(小君=細君)'이란 본래 제후(諸侯)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므로, 동방삭은 자기 아내를 그렇게 일컬음으로써 자신을 제후에다 비긴 익살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