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화(蓮花, 연꽃)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 큰애기
연밥 줄밥 내 따줄게 요내 품에 잠들어라
잠들기는 늦쟎아도 연밥따기 한철일세
이것은 오늘날까지 남부에 유행하는 민요로 흔히 농촌에서 모내며 하는 채연곡(採蓮曲)이니, 연이 드문 조선에서는 모를 낼 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종 운치라면 운치이다.
연(蓮)은 본래 인도의 산(産)으로 불교와 깊은 관계를 가진 꽃이나, 한토(漢土, 중국)에 들어와서는 불교를 떠나가지고 아주 현세화하여 오희(吳姬) 월녀(越女)와 깊은 관계를 맺았다. 그리하여 연화라면 벌써 채련녀(採蓮女)를 생각케 하는 동시에 채련곡(採蓮曲)을 그립게 된다.
그러나 근역(槿域,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한토(漢土, 중국)처럼 천연적 호소(湖沼, 호수와 늪)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지당(池塘, 연못)같은 것도 드물기 때문에 인력을 더해서 곳곳에 늪을 파 가지고 연화를 애양(愛養)하였는 바, 경성(京城, 서울)에도 옛날은 남문 밖에 연지(蓮池)가 있었고 서문 밖에 연지가 있었고 동문 안에 연지가 있었으며, 각 성읍(城邑)에는 반드시 이러한 연지(蓮池)들이 있어 불의의 재변(災變)을 방비하는 일방으로 풍치의 미관을 도우려고 꾀하였으니 이른바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있었다.
그 중에 상술(上述)한 상주 공갈못의 연은 전국적으로 저명하였으며 근기지방(近畿地方)에는 수원 방축연과 서해지방에는 해주 부용당(芙蓉塘)의 연이 유명하였었다.
연화(蓮花)와 인연이 있는 전설과 일화가 적지 아니하니, 저 심청전에는 용왕이 심청을 한송이 연화에 담아서 인간으로 내보냈다는 로맨틱한 전설도 있거니와 고려 충선왕이 그 사랑하던 원나라 미희(美姬)에게 연화 일타(一朶)를 꺾어주며 석별(惜別)의 정(情)을 표시한 일화는 미희가 충선왕에게 올린 염시(艶詩)와 아울러 오늘날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바다. 그 미희가 충선왕에게 올린 염시는 이러하다.
贈折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연화가 고려 때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주 신성시하던 판에 이러한 염화(艶話)가 있는 것은 마치 모래틈에 꽃이 핀 셈이다.
연대는 충선왕 전 일이나 연화가 고사곽예(高士郭預)로 해서 당시 일반 시인 사이에 일층 더 음영(吟詠)의 표적물이 되었던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지 연화는 역사적으로 조선인의 미감(美感)을 길러 주고 돠와 준 고귀한 꽃의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다. (文一平의 <花下漫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