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어미닭의 새끼 사랑

如岡園 2017. 3. 13. 18:16

          어미닭의 새끼 사랑


  '자연이 사람을 가르치고 자연에서 배운다.'

 이 평범한 진리마저 그것을 진정으로 터득하고 깨닫는 데는 일정한 과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까마귀를 반포(反哺)의 조(鳥)라 하여 보은의 표상으로 삼았던 것도 자연현상에서 본을 배워 사람을 일깨우는 한 수단이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고 어떤 관점으로서는 사람보다도 훨씬 똑똑한 짐승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동물을 그 앞에다 '애완(愛玩)'이라든가 그것도 모자라 '반려(伴侶)'라는 관형어까지 덧붙여 가면서 육친(肉親)을 돌보는 일 이상으로 보살피는 풍속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동물은 어디까지나 동물이고 사람과는 종(種)이 다르기 때문이다.

 농장을 경영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7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농장에서 과채류를 심어 가꾸고 닭을 기르면서 내가 보고 느끼고 깨달은 바는, 앎의 질에 있어서 독서나 견문을 통해서 내가 얻어낸 지식과 감동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계절의 순환에 따른 태양열, 지표면, 대기류의 변화에 감응하는 삼라만상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농작물을 가꾸고 가축을 사육해 그것들의 생명현상을 지켜보면서 암묵으로 대화하고 그들의 삶이 어느 만큼 진지하고 처절하고 신묘한 것인가를 느껴 보게 된 것, 이것은 인생의 만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니던가.


 수도권 가장자리에서 산업화가 다 돼버린 도시라고는 하지만,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산고양이가 뛰어놀고, 장끼 까투리 까막까치 온갖 산새가 지저귀는 조용한 산기슭, 자그만 숲도 있고 농경지도 있다. 산골물이 흐르는 풍경이 곁들여지면 생각 나름으로는 휴식 휴양을 할 만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초기에는 유독 야생의 꿩과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가 많았다.

 꿩의 서식지는 양지바르고 통풍이 좋아 풍수지리에서도 '꿩설'이라 하여 길지로 치는 곳이다. 아닌 게 아니라 '꿩설'의 혈(穴)이 됨직한 일정한 반경에는 꿩을 비롯해 산비둘기 같은 조류의 천국이었다.

 비자나무 가지 사이에는 산비둘기가 알을 품어 후손을 번식하고, 까투리와 그 병아리 꺼병이의 천연한 삶도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 이름 모를 맹수의 습격으로 내장을 모두 파먹힌 장끼의 죽음 곁에 처연히 날아드는 동류(同類)의 수꿩, 임자없는 산새의 알......

 내가 닭을 기르게 된 연유도 이러한 환경에서, 까투리와 그 병아리 꺼병이의 천연스러운 삶을 지켜 봤던 연장선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어린 시절 정월보름날 새벽에 조부님의 지시로, '워리 한마당! 구구 한마당!' 하고 계견(鷄犬)의 번창을 기원하던 민속행사의 회상도 있고 하여 작정없이 닭을 기르게 되었다.


 농장의 산기슭 언덕배기는 거목으로 자란 참나무, 아카시아 나무들의 그늘 밑 양지바른 곳이라 천연의 양계장이었다.

 달걀을 낳고 어미닭이  첫 병아리를 깼을 때는 환호성을 질러댈 만큼 기뻤다. 얼기설기 얽어둔 양계장이 맹수의 침범으로 풍비박산이 되었을 때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도 온갖 생령(生靈)들의 삶의 각축(角逐) 현장이라 적자생존의 엄연한 자연적 질서가 있었던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허점을 보완하여 생업으로서의 양계가 아니라 그저 재미삼아 닭을 기르게 된 것이 어언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르르르 딱! 다르르르 딱! 하고 딱다구리과의 작은 멧새가 나뭇가지를 쪼아 둥지를 틀고, '구국! 구구국!' 하고 산비둘기가 산자락 텃밭의 적막을 깨뜨릴 적이면 어미닭도 병아리를 깨 풀밭을 누빈다.

 방문객을 따라 온 어린 꼬마가 병아리 한 마리를 가져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어도 기어코 주지 않고 울려 보낼 만큼 병아리를 아꼈다. 봄날, 초등학교 정문 앞 병아리 장수에게서 사가지고 간 병아리의 운명이 모두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죽을 것이 뻔한 목숨을 함부로 내주기는 싫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던가.

 어미닭의 새끼 사랑은 자녀를 키워내고 또한 교육의 현장에서 일생을 봉직(奉職)한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천연의 토종닭은 봄 한 철 가을 한 철 두 차례에 걸쳐 일정한 둥지에 스무 개 정도의 알을 낳아 품어 스무 하루만에 어김없이 병아리를 까낸다.

 부화기간 중 암탉의 정진(精進)은 세상을 건성건성 살아온 나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경이롭다. 어떤 잉부(孕婦)나 수도자(修道者)라도 미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알을 까는 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않고 날개 밑에 품은 달걀의 위치를 바꿔 온도조절까지도 하면서 21일 만에 어김없이 병아리를 깨어낸다. 금방 알에서 깨여 나와 깃털에 묻은 물이 마르면 곧장 구슬방울 같이 쪼르르 굴러다니는 병아리를 보살피는 어미닭의 지극정성은 그것이 동물의 본능적인 행위라 치더라도 신비하고 경이롭다.

 '꼬곡 꼬곡, 삐약 삐약' 그들만의 언어와 동작으로 먹이를 찾아주고 품속으로 품어 들여 체온을 조절해 준다.

 사람의 섣부른 보살핌이 낭패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 때이다.

 물을 먹여야겠다고 접시에 물을 담아주면 물에 빠져죽거나 솜털같은 깃을 적셔 오들오들 떨다 못해 낙오하고 만다. 어미닭의 품속은 포유동물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부화기로 까낸 병아리를 아무나 길러내지 못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병아리가 자라면서부터는 더 어려워진다. 이놈들처럼 말썽을 부리는 장난꾸러기는 또 없을 것이다. 족제비나 맹금류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를 한답시고 보호망으로 쳐둔 닭장용 촘촘한 철망 사이를 한사코 빠져나가서는 되돌아 들어갈 구멍을 못찾아 비명횡사하는 애통함을 여러 번 겪고나서야 보호망을 풀어 어미닭에 맡겨두는 지혜를 얻는 것이 아둔한 인간이다.

 한 배에 스무 개의 달걀을 안겨 열 일곱 마리의 병아리를 깐 기록도 있기는 하지만 어미닭이 길러낼 적정 병아리 수는 열 마리 전후가 되는 것 같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농장의 과일나무 밑에서 노니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대견하고 풍요롭다 못해 환호작약(歡呼雀躍)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놀게 하고, 먹을 것 못 먹을 것 자세히도 가려 먹이면서 생존의 방법을 솔선수범하며 가르친다. 

 제 새끼를 해할 적(敵)을 만나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달려드는 어미닭이다. 참으로 무서운 자식 보호 본능이다. 인간의 헛된 병아리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자괴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어미닭의 그런 보살핌을 받은 병아리가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명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될 시기는 알에서 깨어나서 4주째부터다.

 병아리들끼리 서로 쪼면서 힘겨루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먹는 것도 수완이 늘었다. 신기하게도 어미닭이 알을 품었던 기간과 일치한다. 영계가 다 되어가는 제 새끼를 이 때부터 어미닭은 돌보아 주지를 않는다. 이제부터는 제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병아리가 의지를 해와도 부리로 쪼아 쫓아버린다. 야속하리만치도 준엄하다. 어미닭의 새끼 사랑의 진면목이 들여다보이는 시츄에이션이다.


  닭들의 세계에서는 반포지효(反哺之孝)도 없다. 그것마저 초월하여 자연의 이법에 맡겨두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면서 정조(情操)의 통어(統御)에 맹점을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가 모성의 본능이 아닌가.

 탈무드의 지혜가 돋보이는 것도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스무 개 가까운 알을 낳아 스무 하루 동안을 품어 병아리를 깨고, 스무 하루 동안을 보살펴 길러 주다가 자활하도록 매정스럽게 쫓아내는 어미닭의 이런 처신(處身)!

 어린아이가 크면 젖을 떼고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응석만 받아주면서 아이와의 분리를 잘 하지 않는 엄마는 이유부전(離乳不全)의 아이를 만들어 놓고 만다. 아이가 귀엽다고 해서 자라고 나서도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부모에게만 의존하여 자아가 성장하지 않는다. 

 닭 같은 동물의 세계에 이유부전의 아이는 없다. 얼마나 지혜로운 삶인가. 비정, 과잉의 모정도 없고 불효의 자식도 없다. 

 어미닭의 부화기간, 보육시기엔 다른 닭들이 특별한 도움은 주지 않지만 일체의 방해, 관여도 하지 않는다.

 수탉의 권익 싸움이 치열하고, 세력에 떠밀린 놈은 처량한 신세로 연명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모든 동물의 수컷이 짊어진 운명이다.

 

 생명의 탄생이야 신비에 싸였다지만 그 삶은 본능으로 일관된 것이 동물의 일생일 것이다. 먹는 일과 종족 번식으로 압축되어지는 동물의 삶, 거기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아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질서를 세우고 조화를 유지하는 데는 똑똑한 듯하면서도 어리석다.

 자연에다 떠맡긴 토종닭의 방사(放飼)는 작은 보살핌으로도 번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생업으로서의 양계가 아니니 처분의 대책도 없이 수가 늘어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고 있지만, 사람이나 야수의 침범에 따른 희생에는 분통이 터진다. 하지만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을 어찌 거슬릴 것인가.

 닭을 기르면서 닭들의 세계를 들여다 보다가 보면, 나 역시 자연의 흐름에 따라 남은 인생을 그렇게 떠내려 보내고 싶어진다. 

               (2016. 12. 5. 길 제19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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