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심취묵(誑심取墨, 숙모를 속여 먹을 취함)
우리나라의 먹이 생산되는 곳이 한 군데가 아니지만, 특히 해주의 수양(首陽) 매월(梅月)이 가장 으뜸이라. 이즈음 한 재상이 황해도 감사로 제수되어 왔거늘, 그 조카 하나가 먹을 구하는 자가 있었으나 재상이 없다고 우겨서 그 조카가 한탄하던 중,
뒷날에 그 숙부가 어디 나간 틈을 기다리어 부인에게 고해 가로되,
"우리 숙부께서 방백이 되신 후로 두 기생에게 빠진 바 되니, 하나는 수양(首陽)이란 기생이요 하나는 매월(梅月)입니다. 이제 체차(遞差)되어 돌아가는 마당에 전정을 잊을 수 없어 이에 기생의 이름으로써 먹의 표면에 도장찍어 왔거늘 숙모는 그것을 아직 모르십니까? 만일 저를 믿지 못하겠거든 시험컨대 한 번 그 먹을 보소서."
하거늘,
부인이 이에 궤를 열고 열고 본즉, 한 궤 가득한 먹이 다 수양(首陽) 매월(梅月)이라 하였다. 노기 발랄하여 궤짝 채로 던질쌔 그 먹이 땅에 흩어지는지라. 조카가 이에 줏어서 소매에 그득하게 많이 가지고 돌아갔더니, 저녁에 이르러 재상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먹궤짝이 땅에 나가 떨어져 있음을 보고 크게 해괴히 여겨 물어 가로되,
"어쩐 연고냐?"
부인이 꾸짖어 가로되,
"사랑하는 기생의 이름을 왜 손바닥에 새기지 않고 먹에다 새겼나요?"
한데,
재상이 그 조카의 소행임을 알고 부인에게 일러 가로되,
"해주부(海州府)의 진산(鎭山)을 가로되 수양(首陽)이요, 그 산의 매월(梅月)로 그 먹을 이름한 지가 오래인데 부인은 오히려 믿지 않고 꾸짖어 마지 않으니, 내 그 불쾌함을 이길 수 없도다."
한데,
한 때 전해 웃었더라.
야사씨 가로되,
중니(仲尼)가 가로되 "周公의 재주와 아름다움으로도 교만하고 또한 인색하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겠거든, 하물며 범인일까 보냐." 海伯이 분수정먹을 참지 못해 마침내 먹궤짝을 잃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색한 허물이 아닐까 보며, 항우가 사람과 더불어 천하를 함께 하지 아니하여 印을 아로새겨 주지 아니하여 마침내 망함에 이르렀으니, 또한 어찌 인색함으로써 실패함이 아니랴?.
<蓂葉志諧>
# 오묘동심(五妙動心, 마음을 움직인 다섯가지 술법)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이 젊었을 때 도인(道人) 남궁 두(南宮斗)를 만나니, 두(斗)의 나이 그때 팔십여 세에 얼굴 모양이 쇠하지 아니하여 사십 세의 사람과 흡사하였다.
오성이 묻기를,
"선생의 춘추가 거의 90에, 정력이 어린 아이와 같으니 어떤 방법을 쓰셨길래 이와 같사오이까? 원컨대 그 술법을 배우고자 하오."
하니
"나의 술법이 심히 쉬운 것으로 오직 여색(女色)을 멀리 하였을 뿐이로다."
"인간 세상에 좋은 것은 여색뿐이니 만약 여색을 멀리하였다면 비록 천세의 수(壽)를 누렸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대의 말이 옳지 못하도다."
오성이 희롱해 말하되,
"만일 그 꽃같은 얼굴이 빛나며, 고운 살결이 반짝이고, 맑은 노래 묘한 춤이 구름을 막고, 눈[雪]을 돌이키며, 애교 있는 말과 어여쁜 말씨가 구슬이 우는 것 같으며, 연지와 분의 향기가 마음과 코에 부딪쳐 어지러우며, 아름다운 꽃자리에 멋있는 맵시, 지극한 어여쁨이 한가지 이에 있으니 오히려 정을 이끌거든 하물며 이 오묘(五妙)를 겸한즉 비록 광평(廣平)의 철석심장(鐵石心腸)이라도 어찌 움직여지지 않으리이까?"
하니,
남궁 두 도인이 가로되,
"이 오묘(五妙)는 다 염왕(閻王)의 차사인 줄을 그대는 왜 모르는가?"
하니,
오성이 웃으며,
"염왕 궁중에 어찌 한 여자도 없으리오?"
하니,
도인이 웃기만 하더라.
<續禦眠楯>
# 노방영문(老尨靈聞, 허물을 듣기 싫어한 늙은 개)
어떤 나그네가 산협 속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촌가에 투숙하였더니, 다뭇 한 늙은 여편네가 그의 투숙을 허락하면서 가로되,
"이웃마을에 푸닥거리가 있어 나를 청하여 와서 보라 하나 집안에 남정이 없는 고로 갈 생각이 있어도 가지 못하였더니, 마침 손님이 오셨으니 잠간 저의 집을 보살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객이 이를 허락함에 늙은 할미가 갔는데,
그 집의 늙은 개가 곧 웃방에 들어와서 빈그릇을 이끌어다 놓고 겹쳐 디디기 좋도록한 다음, 그 위에 뛰어올라 실겅 위의 떡을 핥아먹었거늘,
밤이 깊은 뒤에 할미가 돌아와 손으로 실겅 위를 만지며 괴상하다고 하는데,
객이 그 연고를 물으니,
"어제 내가 시루떡을 쪄서 이 실겅 위에다 얹어 두었소. 결단코 손님이 잡수실 리는 없고 찾아보아도 없으니 어찌 괴이치 않으리오."
하니,
객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 일을 밝혀 말하기 거북하나, 자기가 훔쳐먹지 않았나 하는 허물을 면키 위하여 이에 그 자초지종의 본 바를 말하니,
할미가 가로되,
"물건이 오래되면 반드시 신(神)이 붙는다더니, 진실한지고 그 말씀이여. 이 개가 이미 수십 년을 지낸 연고로 이렇게 흉측한 일을 하니, 내일에 마땅히 개백정을 불러다가 처치해야겠소." 한즉,
개가 이 말을 듣고 나그네를 흘겨보며 독을 품은 듯한 눈치였다.
객이 마음에 몹시 두려워 다른 곳에 은신하여 옷과 이불을 그대로 깔아놓고 동정을 살피니,
얼마 후에 개가 방 가운데 들어와 사납게 옷을 깨물며 몸을 흔들어 독을 풍기며 오래 있다가 나가는지라,
객이 모골이 송연하여 주인 할미를 깨워 일으킨 후에 개를 찾게 하였더니, 개는 이미 기진하여 죽어 넘어진지라,
객이 만나는 사람마다 매양 그 이야기를 일러 가로되,
"짐승도 오히려 그 허물을 듣기 싫어하거든, 하물며 남의 모자라는 것을 털어 얘기할 수 있을까 보냐."
하였다.
<破睡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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