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무중(五里霧中)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다는 것이니 사물의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환관과 외척이 실권을 쥐고 횡포를 부리던 후한(後漢) 무렵 장패(張覇)라는 선비가 있었다.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권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사귀려 하였으나 장패는 끝내 피하다가 70세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의 아들이 장계(張계)로서 항시 백 명의 제자를 거느린 선비였는데 환관이나 황제의 친척들도 그와 사귀려고 애썼으나 끝내 피하였다.
그런데 장계는 학문 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5리 사이를 안개로 뒤덮게 하였기에 오리무(五里霧)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무중(霧中)이었던 게 아니라 오리무(五里霧)에다 가운데 중(中)자를 곁들여서 쓰는데 불과하다.
# 안서(雁書)
편지, 소식, 방문의 뜻이다. 안찰(雁札), 안신(雁信), 안백(雁帛)이라고도 한다.
소무(蘇武)는 한(漢)나라의 중랑장(中郞將)이었다. 무제(武帝) 천한 원년(B.C 100), 그는 사신으로서 북녘의 흉노국(匈奴國)에 갔다. 포로 교환을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흉노의 내분에 휘말려버려 사신들은 모두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버렸다. 항복을 하겠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느냐 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소무만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산중의 굴 속에 갇혀 굶어 죽을 참이었다. 그는 털가죽을 씹고 눈[雪]으로 갈증을 달래며 견디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죽지 않자 흉노는 그를 귀신인가 싶어 북해(北海, 바이칼 호수) 언저리의 민가도 없는 고장으로 보내어 양을 치게 하였다. 온통 수컷으로만 주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너희 한나라에 보내 주지".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숲과 바다와 같은 호수, 그리고 매운 추위와 굶주림 뿐이었다. 양들도 모두 도적들이 앗아가 버렸다. 그는 다람쥐를 잡아 굶주림을 견디면서도 흉노에게 항복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실상 그런 희망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 황폐한 북녘에서 이미 몇몇 번을 세월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기차고 단조로운 나날이 수없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을 뿐이다. 어쩌다 끝없는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만이 소무로 하여금 속절없이 고향 생각에 잠기게 할 뿐이었다.
고국에서는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 6년(B.C 81)이 되어 있었다. 한나라의 사신이 흉노를 찾아왔다. 훨씬 예전에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실종 되어버린 소무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미 죽은지 오래라고 흉노는 잡아 떼었다. 사신으로서는 그 진부(眞否)를 가려낼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소무와 함께 흉노에 왔다가 항복하였던 상혜(常惠)라는 자가 사신을 찾아와 무엇인지 귓속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래 사신은 다음 회견 때 말하였다.
"우리 한(漢) 나라의 천자께서 사냥을 나가셨을 때 기러기 한 마리를 쏘아 떨어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기러기의 발목에 헝겊이 감겨져 있었오. 그리고 그 헝겊에는 '소무는 대택(大澤)에 있오' 라고 적혀져 있었으니 소무가 살아 있는 것이 명백하오"
흉노의 추장은 놀라는 기색으로 신하와 소근거리더니,
"실인즉, 그 사람이 살아있다 하는구려."
사신이 상혜의 귀띔으로 꾸며낸 거짓말이 적중한 셈이었다. 흉노는 부리나케 북해로 달려가 소무를 데려왔다. 머리도 수염도 이제 셀대로 세고 넝마보다도 추한 가죽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으로서의 부절(符節)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꿈에도 차마 바라지를 못했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어느덧 19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다.
# 출람(出藍)
제자가 스승보다 우수해짐을 말한다.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 B.C 300~240 경)는 말하였다.
"학문은 쉬어서는 안된다. 청색(靑色)은 남색(藍色)에서 나왔으나 남색보다 푸르며, 얼음은 물로써 이루어졌으나 물보다 차다."
스승을 능가할 만큼 학문이 깊어지는 제자도 있다는 말이니, <북사(北史)>에 보면 그 실례가 나와 있다.
이밀(李謐)은 공번(孔번)의 제자였으나 몇해 후에는 이밀의 학문이 공번보다 앞질렀기에 공번은 자진하여 이밀의 제자가 되었다.
하나 무엇이 청이요 무엇이 남인지 현실적으로는 대중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바로 그 말을 한 순자만 보더라도 멀리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가지고 제자인 이사(李斯)와 한비(韓非)에게 물려준 중한 역할이었다. 애초에 공자의 주장은 예악(禮樂)의 나라와 선왕(先王)의 길이었건만 전국(戰國)의 준엄한 현실은 순자로 하여금 성악설(性惡說) 논자가 되게 했으니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므로 인위(人爲)에 의하여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비나 이사는 더욱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나타나 법률과 정치 경제야말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자는 평생을 두고 이상의 정치를 행하기가 소원이었건만 어느 나라에서도 위험시 당하여 용납되지 않았다. 하나 한비와 이사의 사상은 전국의 정치를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었으며 이사는 실지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 밑에서 재상을 지내었다. 청(靑)과 남(藍)의 개념도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셈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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