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망각 그리고 회상

如岡園 2018. 3. 19. 18:52

  한정된 삶에서 나이가 들어가 한참 늙어지면, 망령이 들지 않아도 곧잘 어제 오늘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엉뚱하게도 쓸데없이 어떤 옛날 일이 생생하게 기억되어 회고의 정에 빠져들게 된다.

 살아온 시간보다 앞날이 짧아져 운신의 폭도 좁고, 현실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니 심리적 돌파구가 그 길밖에 또 더 있겠는가?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나이 들어 노숙(老熟)의 경지를 벗어나면 철딱서니가 없어진다. 그것이 노추(老醜)다.

 하루해가 기울어도 저녁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저물어도 귤 향기가 더욱 꽃답다는데, 인지(認知)의 세포가 망가져 치기(稚氣)로 얼룩지는 노구(老軀)의 생명체는 추하기만 하다.

 미래는 항상 불확실성이 본질이기 때문에 노숙에서 치기로 돌아서는 반환점이 어디일지 미리 알 수가 없어 스스로를 관찰하여 근신하지 않으면 그것도 망신이다.

 노년은 침묵과 망각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지나간 기쁨은 지금의 고뇌를 깊이 하고, 슬픔은 후회와 뒤엉킨다 하니, 후회도 그리움도 다 같이 보람이 없다면 차라리 망각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망각은 만사를 고쳐준다고 믿고 망각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극단론자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신화 속의 강, 레테 강! 

 이 강을 건너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이름하여 망각의 강!

 희로애락(喜怒哀樂), 인간 만사의 모든 사연들을 백지로 화하는 레테 강은 죽음을 의미한단다.

 레테 강을 목전에 두고 망각(忘却)과 회상(回想)의 양 극(兩極)을 반추하는 노령(老齡)의 인간군상(人間群像)이 펼치는 파노라마도 백세시대라서 야단스럽다.


 어린 손자손녀 여석들의 기억력에 신비감을 가지면서, 노령(老齡)에 있어서 어떤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최연소(最年少) 연령의 한계를 가늠해 본 적이 있다.

 어떤 기억은 가장 인상적이거나 충격적이어서 심상(心象)에 깊이 새겨진 것들이지만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환기되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런 예는 다른 사람에게도 흔히 있지만, 어려서부터 내가 들어 온 나에 대한 기억력의 평가는 상당하다.

 세 살 때 천자문을 모두 암송하더란다. 증조부 초상(初喪)에 밤을 새운 모닥불 아래에서란다. 훨훨 타오르던 모닥불의 환영이 지금도 머리 속에 떠오르니 세 살 때 앵무새처럼 천자문을 암송했던 건 맞다. 만 세 살이니 네 살이 되나?

 바로 밑의 동생이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어른들이 애장을 하러 가는 날, 나는 멋모르고 마당에서 '고추 먹고 맴맴'을 하여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삿갓을 눌러 쓴 징조부의 품안에는 포대기에 말아 싼 한 살 배기 동생의 죽음이 안겨있었지. 그것도 내 나이 세 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기억력을 되살릴 수 있는 최연소 한계는 만 3세가 된다. 

 지금 나의 일본어 50음 '가나'와 일본어 실력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8세 전후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새로 익혀 더 공부를 하려해도 늘 그 상태다. 어깨너머로 누나들의 일본어 교과서를 읽어 외고, 딱 한 학기 왜정 치하의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인데 기억의 분량은 놀랍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 시기의 조기교육은 절대적인 명제다.

 이런 나의 기억력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흔히 그런 것이지만 유소년(幼少年)의 시기에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자부심은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추진력에 보탬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대학교수 경력을 가진 지금의 내 머릿속에는 참으로 많은 지식들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한 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열 개는 준비되어 있어야 했으니까 지식의 총량은 무한대를 지향했던 것 아닌가. 그런 지식들이 지금은 분출구를 잃고 마그마처럼 가슴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 지식의 얼마를 책에서 증거물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이제 얼마쯤을 지나 이른 바 신화 속의 강, 레테 강을 건너기만 하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망각(忘却)도 회상(回想)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람은 무엇이나 잊을 수가 있으나 자기 자신만은, 자기의 본질만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망가져 가는 자신의 본질을 보듬어 안고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아주 늙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면 자기 집 열쇠만 잊지를 말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망각의 늪으로 던져버리는 것도 안일(安逸)일 수 있다. 

 그리하여도 가슴 속에 흐르는 강! 요물처럼 솟아나는 회한(悔恨)일랑 어쩔 것인가.

 부모 형제자매 자손에게 드리워진 친애의 정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버팀목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세파(世波)를 헤쳐 온 부부애(夫婦愛)는 눈물겹기만 하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은 회상(回想) 속에서 활개를 친다. 미숙(未熟)과 수오(羞惡), 우유부단(優柔不斷)으로 말미암아 내 쪽으로 자장(磁場)과 극성(極性)을 형성하여 유인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을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그에 대해서는 표현력이 부족한 나의 말로써는 다 말할 수가 없고 굳이 고답적인 명사(名士)의 명시(名詩)를 빌 필요도 없다.

 그런 회상(回想)과 애상(哀傷)은 이미 대중가요의 가사가 모두 말해버린 것들이다. '사랑의 미로', 첫사랑의 강', '사랑 하나', '마포종점', '낭만에 대하여'......


 청량한 가을 햇빛을 따라 오곡백과가 영글어 가고, 여름 꽃들이 이운 자리에 가을을 치장하는 꽃들이 앞 다투어 산야를 물들인다. 

 인생인들 한 번 피고 지는 저 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성장기에 왕성한 세포분열로 증식하였을 지각세포(知覺細胞)가, 이제는 하나하나 죽어가는 노년기에 망각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져 어떤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고, 어떤 것은 생생하게 되살아나 가슴 속을 어지럽힌다.

                                                                       (2017. 12. 11. 동인지 <길>21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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