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이제는 감성까지 무디고 상념(想念)마저 타오르지 않는 것을 편하다고 생각하여야 할까 아니면 안타깝고 두렵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정을 나누었던 오랜 친구, 젊은 가슴을 애태웠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을 파고들 때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Ever green',
-"봄이면 가끔씩 사랑이 움트고/ 여름이면 사랑의 꽃이 피어 납니다/ 겨울이 다가와 꽃잎이 시들면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다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와도......."
그리고 또 동무생각, '사우(思友)',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마음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이런 것들.
하잘 것 없는 팝송이라거나 특별한 명가곡도 아닌데, 하는 것을 따질 것도 없이 그저 이들 노래의 가사나 곡조의 흐름이 감미로워서 젊을 때 무척 즐겨 불렀던 것인데 지금 와서 새삼 이런 노래가 무디어진 심금(心琴)을 울리는 것이다.
그것은 꿈같았던 옛날을 그리워한다는 행복을 상상하는 것,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서글픔과 위안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내로남불'로, 깊이와 넓이를 따질 것도 없고 흘러가 버린 로맨스, 아니면 진행이 무한대인 플라토닉 러브, 이런 것들이겠지.
벗에 대한 상념(想念)은 사랑에 대한 감정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서적 처리가 더 어렵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잘못하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그럴 수가 있나.'가 되기 쉽다.
동요조의 선율이 바탕을 이룬, 작곡자의 가곡으로서는 퍽 고조된 작품으로 악보에 정리된 곡을 작사자에게 부탁해서 가사를 붙이고 전반부의 전형적인 동요 풍에서 후반부의 변박자에 이르러서는 감정을 격화시킨 것이 퍽 효과적이라는 '사우(思友)'는, '동무 생각'이라는 타이틀과 리듬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그 동무가 짝사랑 소녀였다는 것에 김이 새버린다. 그냥 '동무'였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애정과 우정은 기본적으로 정조(情調)가 다르기 때문에 이성간의 동무 사이에서 우러나온 감정은 애정이지 우정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벗에 대한 우정은 육체적 본능을 바탕으로 한 이성간의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고, 그것은 속성상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한 로고스적인 이데아이다.
어릴 때 친한 벗을, 장성한 뒤에 혹 까닭없이 서로 소원하게 되는 자는 천박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평생 친한 벗은 중간에 혹시 소식이 끊어졌더라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가 서로 만나게 되면 반갑게 해야 하고 서먹서먹하여 무정한 듯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람은 항상 벗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새로운 벗을 만들지 않으면 외따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한 것이다.
벗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우정을 배양해야 하며 힘써 오래 돌보아 주는, 이를테면 우정에 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어려서부터 친근하게 지내온 벗, 허물없이 친하게 사귀어 왔고, 터놓고 정답게 지내온 사이, 혹은 같은 사회적 처지에서 같은 목적이나 취지를 가지고 생활하고, 자주 만나 어울렸던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한평생을 두고 길이길이 공경함을 잃지 않고 사귀어 온 것이다.
옛벗은 백발이 성성해도 우정에는 새로움이 있으며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과 잠깐 서로 말을 나누었다 하더라도 진정이 통하면 옛벗처럼 다정스러울 수 있는 것이 우정이기도 하다.
특히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죽마고우(竹馬故友)라면 가슴 속에 깊이 각인(刻印)된 동심으로서의 우정, 동경(憧憬) 같은 것이 도사려 있어 쉽게 잊을 수가 없게 된다.
나에게는 꿈같은 소년시절, 내 영혼을 사로잡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 친구는 내 나이 14세 초등학교 6학년 6.25때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자기네 누님 댁으로 솔가(率家)하여 피란을 와서 사는 바람에 나와 친구가 된 것이다.
그는 화술이 능통한 말재간에 아는 것이 많아 우리 또래 동무들의 우상이었다. 동화며 문학전집류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인 데다 재능까지 있어서 많은 내용을 잘 소화하여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장호원이라는 지명도 이 친구에게서 들어 알았고, 경기에서 남도길 천리, 적치(敵治)하(下) 피란길의 애환을 선연하게 그려내 이야기해 주는 바람에 마치 우리들이 그 피란민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탄피나 전쟁 잔존 폐기물 같은 것으로 새총을 만들어 우쭐대는가 하면, 우리들은 구경도 못했던 일제 야마하 하모니카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어대는 솜씨는 우리들의 넋을 사로잡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되놈 말이라면서, '니 하오! 취 팔로마?'를 욕된 말로 바꾸어 웃기기도 했다.
전쟁 통에 우리들의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이 1년 6개월로 길어지고, 장호원에 학적을 둔 그는 전입도 복학도 하지 않은 채 떠돌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는 6.25전까지 장호원에서 성장하였지만, 부모의 관향(貫鄕)이 우리와 같은 고장이어서 피란지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생활터전을 잡아가야 했던 것인데 그만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 관한한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 친구의 부친은 일제 때부터 전매청 관련 관리로 봉직하면서 상당한 녹(祿)을 받고 호부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해방 후 좌우 갈등과 전란의 와중에서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다.
이 친구가 없어지고 나니 이 친구의 존재가치가 더 돋보이고 보고 싶었다. 그 시절 그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던 여동생 난이는 학교 선생이 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친구의 행방을 물을 곳도 없게 되고 말았다.
나로서는 '동무생각' 노래의 서정(抒情)에 대입되는 고구(故舊)이기도 한데, 평생을 통하여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으면서도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던 것이, 우연히도 서울에 있는 이 친구의 생질 자제(子弟) 결혼 주례를 맡는 바람에, 혼주(婚主)에게 외삼촌의 안부를 물었더니 뜻밖에도 장호원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꿈같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고장에 혼자 돌아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장호원이라면 그가 피란시절 동화처럼 들려준 고장이고, 내가 인생 말년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는 이천시의 일역(一域)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친구가 지척에 살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 하나로 거처를 물었더니, 일생동안 삶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지 주소의 노출을 꺼려하는 것이었다.
한평생을 두고 마음속에 그리던 친구를 지척에 두고도 선뜻 찾아 나설 수가 없게 된 사정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 친구를 만나면 세월이 바꾸어 놓은 이 친구에 대한 우정을 무엇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두렵기도 한 것이다.
사람은 환경과 조건이 바뀌다가 보면 이러한 우정의 관점에도 다소 변동이 따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웃사촌이라고, 가까이 있어 자주 만나야 정이 샘솟고 자주 만나다가 보면 다소 소원하게 지냈던 친구도 가까운 친구로 재확인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반대로 입에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도록 다정했던 친구도 멀리 떨어져 연락이 끊기면 거리가 멀어지는 것도 인지상장(人之常情)이다.
긴 세월을 두고 사귄 동무도 잠간 사귄 듯 잊을 수가 있고, 잠깐을 사귀었어도 오랫동안 사귄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 어릴 적 동무는 참으로 잠깐 사귀었는데 평생을 마음 속으로 그리워했으면서 지금 만날 수가 없다.
그 대신 나는 이 친구를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면서 인근에 있는 장호원엘 일부러 몇 번 다녀왔다.
담쟁이덩굴(청라)이 담벼락을 휘감은 오래된 주택가를 서성거리면서 70년 전 그 친구의 환영을 더듬어 본다. 지금은 꼬부라진 늙은이가 다 된 그 친구를 지금 이 길거리에서 만나면 어쩔까!
청라언덕 위에 백합같은 내 동무는 이제는 없다.
80 노구(老軀)에 내가 찾고 있었던 동무는 꼬부라진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 이상이 용솟음쳤던 청소년 서0진이었던 것이다. (2018. 8. 30. 길 22호.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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