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어느 知人의 무덤

如岡園 2017. 9. 27. 23:30

  같은 처지에서 생활하고 자주 만나 허물없이 친하게 사귀게 되고 서로 터놓고 정답게 지내는 사이를 흔히 벗이라 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친근하게 지내온 벗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로 동무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북쪽에서 이른바 공산주의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라는 뜻을 강조하여 나이의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쓰기를 꺼려하는 말이 되었고, 그냥 벗이나 친구, 친우, 외우, 붕우라 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라 하겠다.

 '同師曰朋이요 同志曰友'라 했으니 朋과 友는 또 함의(含意)가 다른 것이지만 벗이라는 포괄적 개념에서는 매한가지다.

 삼강오륜을 지상의 덕목으로 내세웠던 전통사회에서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명제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이는 민주사회에서 더욱 실천해야 할 덕목이 되고 있다.

 육친이 없는 천애(天涯) 고아(孤兒)의 외로움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벗이 없는 인생의 삶도 적막강산이 아닐 것인가.

 그리하여 사람들 모두는 벗을 찾아 사귀고 좋은 벗을 가려 자랑하기도 한다. 같은 사회적 처지에서 같은 목적이나 취지를 가지고 생활하고 자주 만나 어울린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한평생을 두고 길이길이 공경함을 한결같이 한다.

 벗은 가리어 사귈 필요가 있지만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편벽된 일이니 착하면 따르고 악하면 고쳐 착함과 악함을 모두 내 스승으로 삼으면 될 것이로되, 자기 수양이 따르질 않아 벗을 지나치게 가려서 사귀고 또 걸핏하면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절교하는 일도 잦게 된다.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에서 벗을 사귀는 도리를 이렇게 적고 있다.


 "남과 처음 사귈 때 비록 마음에 든다고 하여도 지기(知己)라고 일컬어서는 안되고, 사귄지 오래된 사이에는 마음에 거슬린다 해서 갑자기 절교를 논해서는 안 된다.

 뜻이 같은 사람이 성의로써 먼저 와서 사귐을 청하거든 즉시 가서 사례하라.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장기 바둑이나 놀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詩文) 서화(書畵) 기예(技藝)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許與)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벗 사이에 공(功)이 되는 일과 허물이 되는 일이 있으니 그 중에서 죽은 벗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공이 되고, 죽은 벗과 비천하였을 때의 벗을 저버리는 것은 큰 허물이 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군대생활에서의 동료, 직장생활에서의 동료 모두가 같이 생활하던 때처럼 달가워지지를 못하고 벗으로서의 생명이 길지 않은 것은 그 속에서의 생활이나 사귐이 지극히 자기 편의에 입각했던 탓이었던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교적이지 못한 나는 많은 벗을 사귀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한다. 사귐을 청해 오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야 수용과 포용력이 관대하지만 벗의 사귐도 관리를 하기 나름이어서 지속되는 경우가 흔하지를 못하다.

 그나마도 나이가 들어가고 친척 친지 친구들 중에서도 세상을 뜨는 일이 늘어나니 감회가 서글프다. 

 잡은 고기보다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고 나로서는 참 아쉽고 아까운 벗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새로운 벗을 만들지 않으면 곧 외따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법이니 사람은 항상 벗을 만들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벗다운 벗을 만나기가 어찌 그리 쉬운가?


 나에게는 만년에 들어와서, 어려서부터 사귄 동무도 아니고 같은 사회적 처지에서 같은 목적이나 취지를 가지고 생활하면서 자주 만나 어울린 친구도 아니면서 우연히 알게 된 벗이 하나 있었다. 

 벗이라고 이를 만큼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귄 것도 아니었으니 가까운 지인(知人)쯤으로 자리매김을 해도 좋을 것이다.

 직장에서 때늦은 정년퇴임을 하고 늘그막에 자식들이 가까이 있는 수도권으로 생활 근거를 옮긴 터라, 어울려 말이라도 건넬 벗이 아쉬웠던 참에 지인이 하나 생긴 것이다. 아무나 벗을 만들어 내지 않는 성격에서 사귀게 된 벗이었으니 나로서는 천생연분의 친구인 것이다.

 쌀의 고장 못지않게 인삼밭이 즐비한 곳이라 아침 산책길에 빨간 인삼 꽃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말을 걸어오는 농사꾼 차림의 촌로(村老)가 있었다. 인삼밭 주인이었던 것이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오래 전부터 사귄 사람같이 낯설지가 않아 통성명을 하고 그 인삼밭에 면한 집으로 초대되었는데 잔디밭으로 단장된 넓은 정원에 하얀 2층 양옥집이 주인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압적이었지만 한 살 밑의 연배(年輩)에 하도 격의 없이 대해주는 바람에 단번에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사는 곳과는 한 5 리나 떨어진 거리라 걸어서 자주 만나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적조(積阻)하면 서로를 찾아 술잔이라도 나누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어 왔는데 비교적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사귐을 통해서 내가 그의 내질(內質)을 파악한 바로는,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산다는 것,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옹졸하지 않고 너그럽다는 것,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가식이 없고 순수하다는 것 등이다.

 선조(先祖)가 고려 때 글안 여진의 장수로 귀화하여 그 은공으로 이곳 이천에 자리 잡게 되어 토지가 막대했었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남겨진 토지가 이곳저곳에 많이 흩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인삼에 대한 관심으로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그가 신바람 나게 자랑했던 것도 인삼 이야기였다.

 지역 인사로서의 당연직 조합장 시절 도쿄 세계박람회 때 내어다 판 고려인삼의 영웅담은 내가 들어도 신났다. 쌀로 1천 석에 값할 만한 돈을 벌었다니 인삼이 아니라 금삼이 아니었던가!

 심정으로 공감을 이루었던 이야기는 6.25전쟁 때의 일, 남으로 쫓겼던 피난길은 제가끔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갔단다. 멀리 장호원에서 바라다 본 원적산 산자락 동네가 훤한 불바다가 되었을 때 발을 동동 굴었지만 대책은 없었다는 것.

 '이천에 와서 돈 자랑 말고, 이천에 와서 힘자랑 말라'는 부자 고을이라지만 땅을 지키는 일에는 허리가 휜다. 검게 탄 얼굴, 더득장아찌 같은 손발에 훈장은 없다.

 중년을 바라보는 네 아들이 모두 미혼이라고 자탄(自歎)이었는데, 둘째 놈하나가 며느리를 데려왔다고 기대를 건다. 타지도 않을 고급 승용차를 혼수로 가져온다는 위세(威勢)마저 못마땅한 토종의 늙은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신 술이 원수였다. 일을 이루려고 사교하면서 마시고, 기분 좋아 마시고, 홧김에 마시고, 친구 만나 한 잔이요. 헤어지며 이별주라. 기쁨도 눈물도 술로써 다스리다 보니 끊을 수가 없다.

 술친구가 된다는 것은 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피차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런 방향으로 친교가 이루어져 가고 자칫 주변 가족의 눈에 그렇게 비쳐지는 기미가 보일 때쯤 나는 근방 타지로 주거를 옮길 처지가 되어 서운한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기회가 있으면 자주 찾아오겠노라고 약속은 했지만 말 같지 못하다가 그 이듬해 봄 무렵 안부가 궁금하여 근처에 갔던 김에 들렀더니, 대수롭지도 않은 듯 정기 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건강 관리에 소홀하고 상습적으로 음주를 하니 병이 왔을 것이지만 의술의 발전으로 위암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아 수술 경과가 좋다하니 괜찮으려니 하고는 그동안 사귀며 쌓아왔던 정리(情理)를 가슴에 묻어둔 채  그냥 세월을 흘려 보냈다.


 그로부터 또 7년의 세월이 흐른 금년 봄, 무단히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나와 그 친구의 동네 근처까지 갔다가 꼭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동네 어귀를 들어섰는데, 그의 농토이리라 싶은 길가 밭뙈기에 덩그마니 새로 치장한 봉분이 하나 들어서 있어 가슴이 철렁하였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왔던 터라 혹시 그이에게 변고가 있지 않았나 싶었던 것인데 봉분 비명(碑銘)이 있어 확인을 하였더니 타인의 묘소라 일시 안도를 하였다.

 문제는 그의 집을 찾아가 사전 연락도 없이 들어서기가 어려워 낌새를 보고 있는데, 지인(知人)의 행적은 눈에 띄지를 않고, 모 심을 논을 다지고 돌아와 트랙터를 세척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들 하나는 곁에 두고 농장을 관리해야겠다는 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농사일에 찌들어 수염마저 더부룩한 용모가 안쓰러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모른척 하고 지나가다가 지인의 안부가 너무도 궁금하여 되돌아가 신상을 밝히고,

 "이 아무개 씨 안 계십니까?" 하였더니,

 "저의 아버님입니다. 6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묘소는 저기 보이는 우리 집 밭터입니다."

 아뿔사!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여러 형태의 부고(訃告)를 접하고 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죽음을 실감한 부고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는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아주 다정한 벗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평범한 지인이자 벗으로 자리매김하였던 그이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자괴(自愧)가 밀물처럼 가슴에 다가들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덤은 그가 젊은 시절 6년 근 인삼을 수확하여 도쿄 박람회에 내어다 팔아 일확천금을 하였다고 영웅담을 펴놓던 그 인삼밭 건너편 그이의 문전옥답(門前沃畓)에 있었다.

 추석을 지난 어느 달 밝은밤, 우리 둘은 그이의 밭자락 끝 묏등에서 하나가 된 마음으로 제가끔 살아온 추억담에다가, 변해가는 세태를 놀라워하는 담론을 장시간 펼친 적이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그렇게 밝아 보인 것도 어린 시절 고향의 뒷동산 그것과 같았다.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며 우리는 어린 시절 동무로 착각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 속내를 드러내었다. 군데군데 널버러져 있는 선영(先塋)을 옮기는 일이 달갑지 않고 예사롭지 않다고도 했었다.

 지금 그이의 무덤이 된 곳은 팽창일로에 있는 도시의 개발지역 지근이어서 이장(移葬)이 염려스러웠다. 자택과는 불과 1, 2백 미터 상거의 자리라 저만큼 떨어져서 살던 집을 바라보는 격이었다.

 망인(亡人)의 선고(先考)와 함께 가족 묘원(墓園)을 이루고 있어 생시부터 의도하고 있었던 자리 같은데 영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긴 인생살이에 영원이란 게 어디 있겠는가. 

 이미 봉분에 금잔디가 도탑도록 자리 잡은 무덤 앞에 합장한 채 인생의 종말은 모두 한 길임을 묵상(默想)했다. 시인이 못 되어서 그런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시로 남기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면서......       

                                                                      (2017. 7. 30. <길 20호>.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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