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말의 생성과 품격

如岡園 2018. 2. 6. 21:39

 언어생활의 면에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사상 또는 어휘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물결치는 해안의 조약돌처럼 인간은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세련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우리들의 언어는 얼마나 조잡한 건가.

 만약에 우리가 심리적인 연관을 덮어 두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해서 허위인 것이고, 그 말을 하기로 한다면 마치 우리가 조잡하고 야유적인 것처럼 들린다. 

 아무 죄도 없는 낱말이나 어휘들이 인식의 오류나 판단의 착오 내지는 무지에 의해서 부침(浮沈)을 한다면 그런 난센스도 없을 것이다. 

 각하(閣下), 영감(令監)과 같은 말들이 독재와 권위 의식이 판을 치던 세상에서 씌어졌다고 하여 종적을 감추더니, 높임의 뜻을 가진 접미사 '-님'이란 말이 분별없이 아무데나 붙어 다녀 어색할 때도 있다.

 말에도 족보가 있고 품격이 있는 것이니 그것을 잘못 사용하거나 잘못 만들어 쓰면 품위나 교양에 금이 가기 마련이다. 

 혁신의 바람을 타고 국어를 어지럽히는 일들이 많아 눈살이 찌푸려진다.

 외래 낱말이 국어 속에 제멋대로 들어앉아 있어 의사 소통을 방해하는가 하면, 국어의 조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들이 생성되어 우리말 문법체계를 흐려 놓는다.

 대수롭지도 않은 숨은 우리말 하나 찾아 어떤 집단에 유행시켜 놓고 애국자연하는 지도자도 있어 면구스러울 때도 있다. 한문으로 이루어진 고사성어(古史成語) 하나 익혀 유식(有識)함을 포장하는 정치인도 있어 가소롭다.    

 추측이나 불확실한 단정을 나타내는 '~은/~을 것 같다'와 같은 표현법의 유행은 의사 표현에 있어 자신감을 상실한 애매모호한 인간군상을 양생하는 것 같아 민망스럽다.

 대학가(大學街)에서 '오후(午後) 몇 시'라 할 것을 '늦은 몇 시'라고 공고하는 무지를 두고 분개한 적이 있다.

 '늦은 4시'라면 어느 시점(時點)인지 막연하기 짝이 없다. 4시보다 늦은 것인지 상대적으로 '이른 4시'도 있는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는 시각(時刻)의 개념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아나로그 시계로 12 시간씩 두 바퀴가 돌도록 되어 있어 같은 수치의 시각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표시함이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서양에서는 A.M(라틴어 Ante Meridien의 약자, before noon의 뜻) P.M(라틴어 Post Meridien의 약자, after midday의 뜻)으로 구별하고 있고, 우리는 12支로 표현되는 12시간 중에서 낮시간 '午時'(11시~1시)의 한가운데인 '正午'(12시)를 기점으로 하여 그 앞시간 대를 '午前', 그 뒷시간 대를 '午後'라 하고 있다.

 이런 분명한 전통적 시각 개념을 무시하고 '늦은'이라는 불명확한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 내어 무비판하게 쓰고 있는 것은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날이 갈수록 국어에 대한 무지는 활개를 친다. 식품(食品)이 '먹을거리'에서 '먹거리'로 둔갑을 해버렸으니 의복(衣服)도 '입거리'로 변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도 그런 것쯤이야 문법적 오류나 언중의 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접어둔다 치더라도 의미론적인 입장에서 용어의 오용이나 어떤 의식(意識)이 부적절하게 작용하여 크고 작은 파장을 일으킨다면 문제가 된다. 

 '영부인'과 '밥하는 아줌마'라는 말이 구설(口舌)에 오른 적도 있다.

 '영부인'은 '令夫人'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의 아내를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지체가 높은 사람의 아들을 '영식(令息)', 그 딸을 '영애(令愛)'라 한 것과 같다.

 부인과 동반(同伴)되는 초대장에 부군(夫君)의 이름을 적고, 동(同) 영부인(令夫人)이라 했던 걸 기억한다. 그렇고 보면 '영부인(令夫人)'이란 말은 그저 지체가 높은 사람의 아내를 일컫는 보편적인 명칭이지 대통령 부인이란 뜻이 아니다.

 대통령도 지체가 높은 사람이니 그 부인을 영부인이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영부인(令夫人)'을 대통령 부인으로만 알고 겸손스러워 한다거나 고압적으로 일컬어진다면 잘못된 판단이다.

 영부인이란 말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란 존재가 없을 때부터 있어온 말이다.

 급식(給食)을 하는 학교에서 밥하는 아줌마를 '밥하는 아줌마'로 일컫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밥하는 아줌마를 밥하는 아줌마로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부를까? 호형(呼兄) 호부(呼父)를 못하는 홍길동도 아닌데 참 딱한 노릇이다. 

 급식을 급식전문 업체에 의탁했다면 밥하는 아줌마는 그 업체에 준하는 직위나 직책의 이름을 따를 것이지  학교 교직원의 직급과 연계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설령 교직원으로 수용되었다 치더라도 밥하는 아줌마의 직책은 밥하는 일이다. 영양사(營養士)나 급양사(給養士), 조리사(調理士) 같은 미화된 이름이 있을 테지만 이름만 그렇게 부르면 뭘하나? 

 하긴 생각해 보면 숱하게 이름들이 바뀌긴 하였다. 식모가 가정부로, 간호부가 간호사로, 운전수가 운전기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신분상승은 별로 안 되었는데 끝이 없다.

 본질이 바뀌지는 않으면서, 바뀌어서도 안되면서, 겉치레에만 치우쳐 변화와 혁신을 치장하려는 의식. 이름을 두고 빚어지는 이 시대를 조명하는 묘한 아이러니이다.

 자고(自古)로 언어는 소박한 언중(言衆)이나 문인의 문학작품을 통해 생성되고 회자(膾炙)된 소통의 도구였다.

 언어는 사회생활을 하는 언중의 자연스러운 발상(發想)에서 교양의 수준과 품격에 맞도록 구사되는 영혼의 소리임을 명심할 일이다. 

 "국어를 정화하고 그와 동시에 그것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선택된 사람들의 직업이다." 라는 괴테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2017. 12. 11. <길 21호>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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