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교학(敎學)은 상장(相長)이랬다.

如岡園 2019. 1. 9. 18:44

  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

 "지극히 심오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모른다. 따라서 배워 본 후에야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쳐 본 후에야  어려움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야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어려움을 안 후에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나의 교사 초년시절, 나를 패기가 있고 기특한 젊은이로 여겼던 서예를 하는 선배 원로교사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내려준 휘호(揮毫) 한 폭이었지만, 정작 그 뜻을 절tlf하게 실감한 것은 실로 교직을 떠나고 난 후가 된다는 것이 무척 아이러니하다.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하였는데 요즘 세상에는 백년은 고사하고 1년의 계획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초, 중, 고, 대학, 대학원을 그도 적령기에 정상적 단계를 밟아 졸업하고 중, 고등, 전문학교, 대학, 대학원에서 40년간 교원생활을 한 나로서는 본능적으로 교육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으니 '敎學相長'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김질해 볼 만은 하다.


  내가 배우는 시기였던, 해방 전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로 되돌아간다.

 "발은 땅에 붙이고 이상은 높게! 구천(九泉)에 뿌리박고 대공(大空)을 향해 날아라!".

 동심의 세계에 이상의 날개를 달아준 스승의 말씀, 그것도 담임보다 지위가 높았던 교감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던, 뜻도 모를 격려에 어린 나는 우쭐했다.

 교편(敎鞭)은 채찍을 들어 가르치는 것, 그렇다고 뭐 그리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서로들 마주 세워놓고 상대편의 뺨때리기를 시키는 벌을 내린 일본 병과 출신 젊은 교사는 야속하기만 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어린 제자를 숙달된 유도 솜씨로 교실 마룻바닥에 메어다 던지는 폭력교사, '아' 하고 입을 벌리라 하고는 침을 탁하고 뱉어 넣는 가학(加虐) 등등, 그런 것을 목격하고 입은 정신적 외상(外傷)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때는 그런 함량(含量) 미달(未達)의 교사도 많았다.

 CCTV가  없었던 시절에도 악행은 드러나 동심에 각인되고 트라우마로 남지만,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에 교권(敎權)은 무조건 옹호되고 있었다. 

 밤을 새운 주색잡기(酒色雜技) 끝 싸움질에서 눈 티 반티가 되어 결근을 해버린 담임선생을 대신하여, 모범전과로 대리수업을 이끌었던 영웅적 행적이 나를 교편생활(敎鞭生活)로 이끈 동인(動因)이었을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를 겪으면서 반공(反共)이 교육의 대명제가 된다. 

 우리의 맹세-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그런 다짐이 있어 대한민국이 건재한 것인가.

 

 사범대학 4학년, 부속학교에서의 교육실습생 시절, 학생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가르치는 자의 사명을 다짐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사랑스런 모습을 나는 일찌기 대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빨리 출근을 하고 싶어 새벽잠을 설쳤던 교사 초년생 시절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너무 서툴러서 교육적 성과는 반감된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과정을 한참 격고 나서야 훈장의 티가 조금 묻어나던 것이었다.

 교육은 우선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說問>에 '敎者上所施下所也니 訓也'라 했으니, 가르침은 위에서 베풀고 그 베푼 바를 아래에서 본받음을 의미한다.

 스승이 될 만한 모범을 닦는 것이 사범(師範)이니 사범교육을 받은 사람은 응당사람이 되었어야 하는데, 다 그러지도 못한 것이 사람의 한계인 것이기도 하다.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여 교감(交感)하는 것이 교육 행위의 기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 효과는 당장으로 판단될 일도 아니었다.


 교육현장의 당면 과제도, 일제의 잔재를 털어내기에도 바쁘고 프래그머티즘을 주조로 하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데도 정신이 없었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런, 국민교육헌장의 실천에 숨가빴던 시절도 있었다. 명분이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게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평생을 잊지 않고 나를 대단한 스승으로 떠받드는 제자를 하나 두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중2 학생이라면 틴 에이지 세대, 판단력이 없고 감수성만 예민해 잘못 나갔다간 걷잡을 수 없이 엉뚱한 인생길로 접어들기 십상인 나이이다.

 보호자가 확실하지 못한, 반 아이 하나가 있었다. 국어수업 시간에 발표력도 뛰어나고 문장력도 있어 총애를 했지만, 학생부에서 불량학생으로 찍히어 여러 차례 징계에 오르다가 정학처분까지 당한 아이였다. 담임된 도리에서 구슬리고 타일러서 붙들어 놓고 있었는데, 하루아침 출근을 하여 교탁을 살폈더니 학교를 그만 둔다는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사라져버렸다. 중2 과정 중도에서 학교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 것이다. 행적을 찾을 수도 없는 아이라 구제할 도리도 없었다. 

 그로부터 10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도 상급학교로 진출하여 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데, 중학 때의 제자 박 아무개라면서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중학생 때 불량학생으로 퇴학하여 2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라면 무엇이 되어 돌아왔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하여, 감히 집으로는 불러들이지 않고 바깥에서 만났는데, 자기의 안부도 전할겸 수능 성적을 가지고 와서 입시 상담을 하려 했던 것이다. 성적도 상당한 급수로 높았다. 

 그 동안의 경위를 묻기도 전에 그가 겪어낸 뼈저린 행적을 일사천리로 털어 놓는다. 불량배와 어울려 서면 일대를 떠돌다가 형제복지원엘 잡혀 들어갔다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굶주림과 구타와 중노동에 시달림을 받다가 탈출에 성공, 전국을 떠돌면서 아스크림 장사에, 껌팔이, 구두닦이.... 안 한 것이 없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 하나 이루어 낼 수가 없었더란다. 

 공부밖에는 길이 없다. 늦게 그것을 깨달아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에 또 공부,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으로 통과했고,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점수도 중위권 대학에는 진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받아냈단다. 그것도 단 1년여 만에.

 그러고 보니 그에게 진학 상담을 해 줄 담임선생은 나 하나뿐이고, 안부도 전할 겸 얼굴을 드러냈단다. 거짓말 같지만 그의 재능을 믿는 나는 그것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도리어 그에게 인생 상담을 청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사람은 가르치는 가운데 배운다. 소년들의 공부를 강제와 엄격함으로 훈련시키키지 말고 그들에게 흥미를 품게끔 인도한다면 그들은 마음의 긴장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학습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는 교육 일생을 살아온 나에게 특별한 예의 제자이자 불가해한 마성(魔性)을 지닌 후진(後進)으로 이제는 성공을 하여 나 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는데 지금도 내 곁을 맴돌고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자신에겐 나 하나밖에 은사(恩師)가 없다면서.

 교육은 인간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가르치는자의 권위는 흔히 교육받고자 원하는 자를 해치는 수도 있다. 우리들의 애매하고 산만한 교육이 인간을 불확실한 것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학교에 있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인생에 있어서 배운다. 교육의 결과물이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은 후에 남아 있는 바의 것이라고도 한다.


 정년퇴직을 하고, 가정에 있으면서 어린 손자 손녀를 건사하는 일은 더욱 난감한 교육현장이 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교육 경력을 가졌으면서도 유아교육의 무지에서 오는 교육상의 오류에는 어처구니가 없다.

 엄마 아빠는 직장엘 가고 할머니는 집안 살림 꾸려나가기에 바쁘면, 서너 너덧 대여섯 살짜리 손자 손녀의 건사는 할아비의 몫이 된다. 말을 배우고 재롱을 떨 때까지만 해도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렇다가 글자를 깨우쳐가고 의지(意志)가 싹터오를 때쯤이면 성가실 때가 있다. 오죽하면 미운 다섯 살이란 말이 나왔을까. 같이 놀아 달라 이야기 해 달라 끝없이 졸라대고,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끝없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힌다. 유아교육에 문외한인 대학교수는 땀을 뺀다. 문학박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면 저는 척척박사라며 대거리한다.

 어쭙잖은 의견 대립에 하도 고집을 부려대어서 채찍을 든 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요즘 아이는 70년 전의 어린아이가 아니다. 자기가 옳은데 왜 때리느냐고 끝까지 자기주장을 하며 대어드는 것이다. 승복을 받아내려는 할아비의 권위 의식과 자기에겐 잘못이 없다는 여섯 살짜리 손녀딸과의 맞대결. 자제력을 잃고 때리고 밀쳤더니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귀중한 머리를 다쳐 뇌진탕을 일으키면 어쩌느냐고 울음을 터뜨리며 앙살이다. 제 어미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훌쩍거리기만 한다. 곤경에 처해진 것은 교육에 관한 것이라면 말깨나 했던 할아버지. 

 여섯 살짜리 손녀와 싸웠다면 말이나 되나. 손상을 했던 그림책을 변상을 하고서야 화해를 했다. 며느리에게는 경위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심지(心地)가 곱은 손녀딸녀석도 함구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중3이 된 손녀의 심상(心象)에 그때의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교학(敎學)은 그런 것이다. 하물며 모성(母性)을 떠난 유아교육이라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유아교육기관에서 벌어졌던 보육아동에 대한 가혹 행위는 상당 부분 이해가 간다. 교육상의 애로점이라는 점에서 공감을 한다.


 "모든 사람은 잘살고 못살고 어른이고 어린이고 간에 본질로 본다면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여! 그대의 힘이든 마음의 모양이든 곧 그대 자신의 것이다. 마음의 모양이야말로 인생 교육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향상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순진한 행복을 바라는 힘은 밖에서 우연한 기회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심정에 파묻힌 힘에서 파낼 수 있다."

 페스탈로치의 이 교육 잠언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다.  

                                                                   (2018. 8. 30 길 22호.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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