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향(天香)과 국색(國色)을 아울러 가진 풍미농염(豊美濃艶)한 목단은 화왕(花王)의 존칭을 받음이 마땅하다. 다만 화왕의 본향이 한토(漢討)냐 천축(天竺)이냐 함에 이르러서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식물학자의 말을 들으면 운남(雲南)의 원산인 듯하다 하니 이 말을 시인할진대 목단이 저 연(蓮)처럼 천축에서 이식한 것이 아니요, 본래 한토(漢土) 고유의 것임을 추찰(推察)하려니와 그러면 우리 근역(槿域)에 수입된 연대와 경로는 어떠하냐. 현재한 사실(史實)로는 신라 진평왕조에 당국(唐國)서 가져 온 목단도(牧丹圖) 및 그 종자가 처음이 되겠다.
삼국사기에는 "得自唐來牧丹花圖並花子云云"이라 하고, 삼국유사에는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이라 하여 史記나 遺事에 마찬가지로 이 사실이 실리었으며 전자는 다만 당으로부터 얻어 온 목단도(牧丹圖)와 화자(花子)라고 적었음에 대하여 후자는 당태종이 화목단(畵牧丹) 홍(紅), 자(紫), 백(白) 3색과 그 씨 삼승(三升)으로써 보냈다고 한층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목단이 한토에서도 저 호사(豪奢)를 극하던 수(隋) 양제 무렵부터 비로소 애상(愛賞)하게 되었고 당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널리 재배하게 되었은즉 이로 보더라도 진평왕 전에 있어는 도저히 수입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개원유사(開元遺事)를 거(據)하면 현종 때 침향정(沈香亭) 전(前)의 목부용(木芙蓉;목단)이 성개(盛開)하였는데 그 중에 일지양두(一枝兩頭)로 아침에는 아주 파랗고 저녁에는 아주 노랗게 빛이 변하여 조석을 따라 향염(香艶)이 다르므로 현종께서 화목(花木)의 요(妖)라고 하여 그 총애하는 양귀비의 종조(從祖)인 양국충(楊國忠)에게 주었다 하거니와 이때로부터 백 수십년이나 앞선 당태종 대에 벌써 목단이 여러가지 빛과 변종이 있었던 것은 진평왕에게 보낸 홍, 자, 백의 3색과 향기없는 꽃까지 있었음을 보아도 넉넉히 짐작할 것이다. 목단의 특색이 농염한 그 화용(花容)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복욱(馥郁)한 그 향기에도 있는 것인데 신라에 처음 가져 온 목단으로 말하면 그 향기가 없었다.
오늘날 앉아보면 거짓말 같아 곧이 들리지 아니하나 사실인데야 어찌 하랴. 그런데 이 향기없는 목단이 도리어 일대 인연을 지어 신라 역사상에 아름다운 일화를 영구히 남기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 일화가 우리네 최초의 여주인인 선덕여왕과 관계를 가졌음은 한층 더 정취를 자아내는 바 있다.
한토(漢土)에서는 목단이 저 양귀비의 연애와 깊은 인연이 있었지만 조선(朝鮮)에 와서는 선덕여왕의 명민(明敏)을 크게 나타내 주었으니 마찬가지 목단이로되 하나는 망국(亡國)의 자(資)를 삼고 하나는 흥국의 자(資)를 삼았다.
선덕(善德)이 여성으로서 임금이 된 것은 신라의 특수한 국체(國體)에 말미암음이나 그의 명민한 재덕(才德)에 힘입은 바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며 그 명민은 어릴 때에 이 목단화도(牧丹花圖)를 보고 향기없을 것을 곧 알아 맞쳤음에 의하여 가장 잘 표시가 되었으므로 그 아버지 진평왕의 사랑이 두터워 여자로서 전례없는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新羅) 본기(本紀)에는 선덕(善德)의 말을 적어 가로되, "此花絶艶 而圖畵 又無蜂蝶 必無香花 種植之果如其言"이라 하여 이 꽃이 아주 고우나 그림에 봉접(蜂蝶)이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으리라고 하더니 심어 본즉 과연 그 말과 같이 하였다고 그의 명민한 선견(先見)에 대하여 칭찬하였었다.
아! 화왕(花王) 목단(牧丹)이 여왕 선덕(善德)을 만나 신라 역사상에 일 이채(異彩)를 내게 하였다. 우리 조선인(朝鮮人)은 천재하(千載下) 오늘 날 오도록 이 선덕의 위공(偉功)을 말할 때는 저절로 목단의 일화를 연상하게 되고 목단의 풍미(豊美)를 볼 때는 반드시 선덕(善德)의 명민(明敏)을 회상하게 된다.
史上에 나타난 꽃 이야기/文一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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