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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설화(1), 세 개의 교일/연기와 연생/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如岡園 2020. 2. 21. 13:09

     # 세 개의 교일(憍逸)

  불타(佛陀)가 태자로 있을 때 어느 날 세상구경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 일일까. 동쪽 문으로 나가면 늙은 이 밖에 보이지 않고, 서쪽 문으로 나가면 병든 이 밖에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렇게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을 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보고 세상이 싫어져 출가를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후대의 불전에서는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로서 윤색되어 전해 온다.

 이것은 불타의 출가의 이유를 밝혀 주는 중요한 이야긴데 불타 자신이 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근거가 있는 것 같다.

 불타가 사위성(舍衛城) 교외의 지원정사(祇園精舍)에 있을 때였다. 그때 불타는 비구(比丘)들에게 자신이 출가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비구들아, 출가하기 전에 나는 무척 행복한 생활을 했다. 나의 생가엔 연못이 있고 거기엔 아름다운 연꽃이 언제나 떠 있었다. 방안엔 언제나 전단향의 향기로운 냄새가 떠돌고, 입는 것은 모두 가시 산(産)의 최고급 옷감이었다. 게다가 나를 위한 세 개의 별전(別殿)이 있어, 겨울엔 동전(冬殿), 여름엔 하전 (夏殿), 봄날은 춘전(春殿)에서 살았었다. 여름의 우기엔 하전에서 가무를 보면서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질 않았고  외출할 때면 언제나 흰 일산(日傘)을 받치곤 했다. 그리고 비구들아, 다른 집에서는 심부름꾼이나 나그네에겐 겨에다 소금죽을 섞어주었지만, 우리집에선 그네들에게도 쌀밥과 고기를 주었다."

 이렇게 호사스런 생활이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까닭은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라고 그는 계속해서 설법했다.

 "비구들아, 나는 그런 생활 속에서 생각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늙는 몸이언만, 아직 늙음을 벗어나는 길을 알지도 못하면서 남이 늙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일은 잊어버리고 혐오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역시 늙는 몸인 것이다. 늙음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생각했을 때 내 청춘의 교일(憍逸)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식으로 병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같은 유형의 사유 모아놓고 부처의 깨달음인 (思惟)를 하게 되었다고 설파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청춘의 교일, 건강의 교일, 생존의 교일을 경계하라고 말한 것이지만 거기엔 불타가 출가하게 된 동기가 알알이 들어나 있기도 하다.


     # 연기(緣起)와 연생(緣生)

 "비구들아, 오늘은 연기(緣起)라는 것과 연생(緣生)에 대해 설법할 터이니 잘 듣고 깊이 생각해 보라."

 여늬날처럼 불타(佛陀)는 지림정사(祗林精舍)에 비구들을 모아놓고 부처의 깨달음인 연기(緣起)의 법을 요약해 말했다.

 "비구들아, 연기(緣起)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삶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분명한 것이다. 존재의 법칙으로 정해지고 확립되어 있는 일이다. 그 내용은 상의성(相依性)이다. 그것을 나는 깨달았다. 때문에 지금 그대들에게 가르쳐 주고 설명하며 '그대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타가 정각(正覺)한 내용, 즉 연기란 존재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의성(相依性)이란 단어는 현대어로 풀어보면 관계성 혹은 인과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타는 계속해서 연생(緣生)에 대해 말했다. 

 "비구들아, 다음엔 연생이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노사(老死)는 연생(緣生)이다. 조건이 있어 생기는 것이다. 조건을 없게 함으로써 노사(老死)도 또한 없애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불타가 출가한 이유는 늙음과 죽음, 곧 고(苦)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에 짓눌려 있는 인간존재를 구제할 길은 없는가. 

 이 커다란 의문은 불타가 우류비라(優留毘羅,우라베라)의 니련선(尼連禪,네란제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연기(緣起)의 법칙을 깨달음으로 해결을 보았다고 하겠다.


     #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불타(불타)가 아직 우유비라(優留毘羅, 우루베라)의 니련선(尼連禪, 네란제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이른바 수하정각(樹下正覺)을 얻은 지 얼마 안되는 불타의 심중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존경할 분, 사사(師事)할 분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 누군가 존경하고 사사할 만한 사문(沙門, 修行者)이나 파라문(婆羅門, 司祭者)이 어디 없을까?"

 불타의 이와 같은 정신적인 방황은 후세의 불교도의 상식으로 보면 해괴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때 불타는 35세의 젊은 나이었으니까 설사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직 천하에 독립할 정신적인 자세가 확립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누군가 같은 사상을 지닌 자가 있으면 서로 의지하고 싶다 한들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리 저리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존경하고 사사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문득 불타의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러했다.

 "나는 법(法, 緣起의 법)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법이야말로 내가 존경하고 경중(敬重)하고 사사(師事)할 일이 아닌가."

 그때 범천(梵天, Brahma 인도의 古神)이 불타(佛陀의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알고, 곧 범천계(梵天界)에서 달려와 불타(佛陀)앞에 나타났다. 

 "세존(世尊, 성자의 존칭)아, 참으로 그러하니라. 과거에 불타(佛陀)였던 자도 법을 존경하고 사사했으며, 미래에 불타가 되려는 자도 역시 그러할 것이니라. 그렇다면 현재의 불타(佛陀)인 세존(世尊)도 역시 법을 존경하고 경중하고 사사해야 하느니라."

 이 일화에서 우리는 후세 불교의 기본적 태도가 되는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최초의 계시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