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어의 한국학

봉이상사설원채(逢李上舍說寃債)/자작지얼(自作之孼)

如岡園 2020. 7. 9. 18:10

         # 봉이상사설원채(逢李上舍說寃債)        

 

 경상도 밀양 군수가 식구를 거느리고 도임하였는데 어여쁜 딸이 하나 있으니 芳年이 열 여섯이라.  通引 한 놈이 눈앞에 잠간 보매 참으로 國色이라, 여인의 유모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정분이 투터워져 할 말 못할 말 다하게 되었는데, 사또가 감영으로 일보러 갔을 때 통인놈이 유모를 꾀어 이르되,

"오늘밤 달빛이 참 좋고 영남루 후원 연못에 연꽃이 바야흐로 만발이오니, 밤 깊은 때 낭자를 이끌고 나와 완상하시면 내가 여차여차히 하리라."라 하니,

  유모가 이미 그 자의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지라, 능히 그 말을 어기지 못하고 그 말에 따라 밤이 깊은 후에 낭자를 유인하여 가로되,

  "오늘밤 월색이 좋고 영남루 후원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였으니, 낭자와 더불어 함께 구경함이 어떠오?" 하니,

  "규중 처녀가 어찌 감히 바깥 동산에 나갈 수 있겠소?"

  "밤이 깊고 사람이 없다 하나 나와 더불어 함께 간즉 조금도 낭자에게는 손해날 것이 없습니다." 하여 낭자가 부득이 좇아가니, 과연 월색은 낮과 같고 연꽃 향기가 옷을 적시매, 사방을 돌아보아도 누구 하나 없는지라, 걸음을 옮겨 대밭 근처에 들어갔더니, 유모는 몸을 숨겨 보이지 않고 대밭 가운데로부터 하나의 흉한이 돌출하여 낭자를 끌어안고 대밭 속으로 들어가 강간코자 하거늘, 낭자가 소리를 높여 크게 꾸짖으며 죽기 한사하고 듣지 않는고로 강간할 길이 도저히 없는지라, 그 자가 곧 칼을 빼어 여인의 가슴을 찌르고 연못 가운데 던져 돌로 눌러 놓았더니,

 이튿날 유모가 거짓을 꾸며 가로되, "낭자가 간곳이 없습니다." 하니,

  衙中이 크게 놀라 사방으로 찾으나 찾지 못하고 본 사또가 환관하매 또한 구태어 찾을 길이 없어서, 사임할 뜻을 보여 印을 들고 돌아가거늘,

  영남은 곧 東軒이라 신관이 도임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하룻밤에 급사하고, 그 후의 신관도 또한 이와 같이 되는지라, 영남루를 폐한 지 오래더니,

  몇 等內 바뀌인 뒤에 冊室李進士가 사처를 영남루에 정하였는데, 관속들이 이를 만류하여 가로되,

 "이 다락은 凶堂이라 어찌 이 곳에 정할 수 있으리오?"  하니, 이진사가 고집하여 듣지 않고 그 곁에 촛불을 밝히고 책상에 의지하여 책을 보고 있었는데,

  밤이 깊은 후에 슬픈 곡성이 나며 陰風이 불시에 일어나고 닫은 문이 스스로 열리며, 한 낭자가 가슴에 칼을 꽂고 유혈이 낭자하여 한 큰 돌덩이를 안고 방안에 들어오니, 진사는 비록 놀라기는 하였으나 조금도 동심치 않고 서서히 물어 가로되,

 "너는 어떠한 낭자로 어떠한 소회가 있어 찾느뇨?' 하니,

 낭자가 눈물을 흘려 흐느끼면서 고해 가로되, 

 "첩은 전전 등내 아무개의 딸이옵니다. 열 여섯에 대인을 따라 왔으나, 유모가 음특하여 나를 죽림 사이로 유인하였더니, 한 훙한이 돌출하여 여차 여차히 해서 칼 아래 고혼이 되고 연못 가운데 더러운 곳에 파묻혔으니, 어찌 원통치 않으리오?" 하거늘 진사가 또한 일러가로되,

 "그자의 성명을 낭자가 들은 바 있느뇨?"

 "성명은 알 수 없사오나 그 놈은 지금의 이방이올시다. 엎드려 원컨댄 上舍께서는 나를 위하여 설원해 주소서." 하고는 문득 자취를 감추거늘,

  이 진사가 그 즉시 사또 자는 방에 가서 사또의 귀에다 대고 지난 밤의 지낸 일을 소근거리니 곧 이방을 잡아들여 杖問한즉 낱낱이 자복하거늘, 날이 밝은 후에 연못을 뒤지니 과연 그 가운데 顔貌가 산 것과 같은 시체가 있었다. 香湯으로써  깨끗이 씻고 새로 지은 의상으로써 염습해서 입관한 후 서울 본집으로 運柩하고 그놈을 머리를 잘라 거리에 걸어 대중을 경책하였다.

                                                                                               <醒睡稗說>

 

          # 자작지얼(自作之孼)

 

 서울 사는 유생(儒生)이 북한사(北漢寺)에 가서 공부할쌔, 그 절에 한 스님이 있으니 나이 겨우 이십에 능히 문자를 알고 백번 영리하고 백번 총명하여, 유생이 일의 크고 작은 것을 논하지 않고 다 맡아서 부리어 깊이 정이 들었더니, 유생이 얼마 후에 과거에 등제하여 혹은 문밖에 출입하는 길에는 매양 그 스님을 불러서 동행하여 담화하여, 서로 말하지 못하는 바가 없거늘, 하루는 마침내 문밖에 나가서 그 스님을 부른즉 그 절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절로 옮겨갔다 하는지라, 서로 만나지 못하니 섭섭한 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후일에 경상감사로 제수되어 순역(巡驛)하고 있었더니, 한 스님이 길가에 피하여 앉았거늘 스님은 감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데, 감사가 본즉 이에 그 스님이라 반가와 불러서 물어 가로되,

 "네가 어디 가 있었느뇨. 오래 보지 못하니 심히 보고 싶었다."

 "소승은 본시 영남인으로 북한사에 삭발하여 오래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고향 근처의 절에 몸을 의지하고 있소이다."

 "너 날 따라오라."

 매양 주막에 묵을 때마다 소찬(素饌)으로써 공궤하고 감영으로 돌아옴에 있어서는 밤에 조용히 불러 가로되,

 "네가 모름지기 장발퇴속(長髮退俗)하고 여기 같이 있자. 내가 상경할 때에 같이 따라가면 내 마땅히 좋은 곳에 장가 보내어 성인의 길을 이루게 하고 너로 하여금 평생에 근심이 없게 해주리라." 하니,

  스님이 제발 사퇴하거늘 감사가 그의 손을 잡고 정답게 물어 거로되,

  "네가 이와 같이 고사(固辭)함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으니 자세히 얘길 하라."

 "사또께서 이처럼 정답게 물어 주시는 터에 어찌 감히 저의 행실을 말씀치 않으리오. 소승이 본래 모읍 모촌의 사람으로 어느 곳에 갔더니, 한 청상과부가 남편의 여막(廬幕)에 새 무덤을 지키는데, 한번 봄에 그 모습이 참으로 천하의 절색입디다. 정신과 넋이 표탕하여 능히 억제치 못하여, 강제로 겁탈하고자 한즉 본시 열녀라, 죽기를 한정하고 듣지 않는 고로, 이에 그의 사지를 붙잡아 매고 강제로 겁탈한 후에 그 묶은 것을 푸니, 여인이 칼을 물고 죽는지라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나다가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드샜는데, 그때 오고 가는 사람들 말이,

 "어느 곳 묘지키는 과부가 칼물고 죽었는데, 그는 반드시 강간당한 고로 그랬을 것이라. 합디다. 그 뒤 또 들은즉, 관가에서 기찰이 심하다는 얘기를 듣고 북한산으로 도주하여 삭발하고 색욕(色慾)을 단념했으므로, 다시는 퇴속(退俗)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감사가 그 말을 듣고 그 옥사(獄事)가 여러 등내(等內)에 전해오매 아직도 미결중이라, 곧 형리를 불러 문안을 들이라 하여본즉, 중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지라 곧 그 중을 잡아 내려 꿇리고 분부해 가로되,

 "네가 이와 같이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내 또한 그것을 밝혀야 할 위치에 있어서 내가 너로 더불어 정이 비록 돈독하다 하나, 가히 가볍게 용서할 수는 없도다."

하고 곧 목을 잘라 거리에 내어 걸어 여럿을 정책하여 과부의 원통한 영혼을 위로하여 주었다.

                                                                                                  <醒睡稗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