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佛敎, 그 思想의 原理(1)/믿음은 種子, 智慧는 호미/彼岸에 이르는 길/악마와 涅槃

如岡園 2021. 12. 30. 17:43

          # 믿음은 種子, 지혜는 호미

 

 붓다는 마갈타국의 남산기슭의 一葦(에카사아라)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이 마을은 어느 파라문의 영지로서 마침 파종 때여서 그가 마을 사람들을 지휘하여 씨를 뿌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의발을 정제하고 탁발을 하기 위해 그 파라문의 집 앞에 섰다.

 마침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있다가 붓다의 탁발의 모습을 보자 그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沙門아,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먹을 것을 얻고 있다. 당신도 자신이 밭 갈고 씨를 뿌려 먹을 것을 얻으면 좋지 않은가."

 그러자 붓다는 선뜻 대답했다. 

 "파라문아, 나도 밭 갈고 씨 뿌려 먹을 것을 얻고 있다."

 그 말을 듣자 파라문은 얼떨떨하게 붓다의 얼굴을 보다가,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당신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본 이가 없다. 도대체 당신의 호미는 어디 있으며 당신의 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무슨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그때 붓다가 파라문에게 대답한 말을 불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韻文으로 기록했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종자요

     지혜는 내가 매는 호미

     身口意의 惡業을 제압하는 것은

     내 밭을 除草하는 것이다

     精進은 내가 끄는 소

     가서 돌아옴이 없고

     修行하여 슬퍼함이 없고

     나를 편안한 심경으로 이끄는도다

 

大地를 갈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美田을 만들어 풍성한 수확을 얻음이 농부의 일이다. 불교는 인간의 荒蕪를 개발하며 아름다운 인격을 형성하여 풍성한 인간을 만들자는 길임을 붓다는 그 파라문에게 역설했다. 이리하여 그 파라문은 불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붓다의 歸依者가 되었다 한다.

 

          # 彼岸에 이르는 길

 

 어느때 붓다는 跋耆(밧지)의 郁伽支羅(웃가지에라)라는 마을에 머문 적이 있다. 그곳은 恒河의 기슭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붓다는 제자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구들아, 옛날에 마갈타국에 한 우둔한 목동이 있었다. 우기의 마지막 달이 지나서 그는 소들을 몰고 恒河를 건너려 했다. 그런데 그는 이 기슭 저 기슭을 잘 살펴 보지도 않고 나루터도 아닌 곳을 소를 몰고 건너다가 물 가운데서 소들을 모두 익사케 했다고 한다.

 비구들아, 그와 같이 沙門이나 婆羅門들도 그들이 이 세계를 잘 관찰하지 않고 일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려 한다면 그들을 따라 믿자던 사람들은 오래도록 불행을 당할 것이다. 

 비구들아, 옛날에 마갈타국에는 한 현명한 목동이 있었다. 그도 역시 우기의 마지막 달이 지나서 소들을 몰고 恒河를 건너려고 했다. 

 그는 먼저 이 기슭 저 기슭 잘 살펴보고 좋은 나룻터를 발견한 뒤에 소들을 건너게 했다. 처음엔 소들 중에서도 가장 억센 소들을 건너게 하여 먼저 저쪽 기슭에 이르게 했다. 다음에는 비교적 억세고 잘 길든 소들을 건너게 하여 이들도 역시 무사히 피안에 이르게 했다. 마지막에는 힘이 없는 작은 소들인데, 그들은 이미 피안에 건너간 母牛들의 부르짖음에 이끌려 이 역시 무사히 물살을 헤치고 彼岸에 이를 수가 있었다.

 비구들아, 그와 같이 사문이나 파라문도 역시 그가 이 세계를 잘 관찰하고 또한 저 세계도 잘 관찰하여 일체를 잘 알면서 사람들을 인도한다면 그에게 듣고 믿으려 하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행복을 누리리라."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의 인간생활을 此岸이라 보고 理想의 인간생활을 彼岸(Para의 譯. 저 기슭의 뜻. 到彼岸이란 저 기슭에  이르는 상태를 일컫는 추상명사. 理想 혹은 완성을 의미한다.)에 두어 이 기슭으로부터 저 기슭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 惡魔와 涅槃

 

 붓다의 제자에 羅陀라는 한 비구가 있었다. 매우 솔직한 젊은이였던 모양으로 극히 기본적인 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솔직하게 붓다 앞으로 나가 질문을 하곤 했다.

 어느날 라타는 붓다 앞으로 나아가 이런 질문을 했다. 

 "大德아, 흔히 악마, 악마라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악마란 무엇입니까."

 붓다는 비구로서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묻는다는 것이 어이 없는 일이라 탓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친절히 대답했다. 

 "라타여, 악마란 이런 것이니라. 우리들의 육체는 우리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며 불안에 떨어뜨린다. 이것이 곧 악마니라. 또 우리들의 감각은 우리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며 우리를 불안에 떨어뜨린다. 이것이 곧 악마니라. 나아가서, 우리들의 감정, 의지, 판단이 우리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며, 우리를 불안에 떨어뜨린다. 이것이 또한 악마니라. 이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면 그것이 正觀, 곧 올바른 관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大德아, 正觀해서는 어쩌자는 것입니까."

 "羅陀여, 正觀할 수 있으면 厭離 곧 싫어하는 뜻이 생기느니라."

 "大德아, 厭離해서는 어쩌자는 것입니까.'

 "羅陀여, 厭離할 수 있으면 離欲 곧 욕망으로부터 떠날 수가 있느니라."

 "그렇다면 大德아, 離欲하고서는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라타여, 離欲하여 해탈할 수가 있느니라."

 "大德아, 그럼 해탈하여 어쩌자는 것입니까."

 "羅陀여, 해탈하면 涅槃에 이를 수가 있느니라."

 "그렇다면 大德아, 열반에 이르러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만, 그만, 羅陀여, 그대는 질문의 한도를 모르는고나. 羅陀여, 나의 가르침에선 열반에 이르는 것이 究極의 목적이니라. 우리들이 이 성스러운 도를 닥고 있는 것은 모두 열반에 이르자는 것이고, 열반에 이르러 우리의 道는 다하는 것이니라."

 이 지극히 솔직한 문답 속에는 불교의 구극의 목적이 表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