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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그 思想의 원리(5). 제2의 화살/末羅族의 우물

如岡園 2022. 7. 13. 12:21

          # 第2의 화살

 붓다가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교사의 태도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붓다는 제자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요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 그것 뿐이었다.

 인간의 교사는 그 가르침을 제자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 자주 음미하는 기회를 갖기 위해 때때로 질문을 하곤 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 한 예다.

 "비구들아, 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도 樂受를 알고 苦受를 알고 非苦非樂受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와 이미 가르침을 받은 자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여기서 受라는 것은 外界의 대상이 인간의 感官을 촉발시켜 일으키는 감각과 거기에 따른 감정을 일컫는 불교의 술어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즐겁게 느끼는 감정 따위를 樂受, 몹쓸 일을 당해 괴로와하는 것을 苦受라고 한다.   때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도 있다. 이것을 非苦非樂受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감각과 감정은 불교신자이든 아니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신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어디에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앞에 든 붓다의 設問이다.     "大德아, 우리들의 法은 世尊을 근본으로 삼고 세존을 眼目으로 하고 있읍니다. 원컨대 그것을 저희들에게 들려 주십시오," 잘 모를 일을 비구들이 붓다에 물을 때엔 이런 語法을 쓴다.

 붓다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밝혀주었다.

 "비구들아, 아직 가르침을 못 받은 사람들은 苦受를 느끼면 탄식과 슬픔에 빠져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마치 第1의 화살을 받고 다시 第2의 화살을 받는거나 비슷하다.

 거기에 反해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苦手를 받더라도 지나치게 탄식하지 않고 정신이 혼미해지진 않는다. 그것을 나는 '第2의 화살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붓다는 계속하여 樂受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했다. 불교신자라 해도 아름다운 꽃을 보면 즐겁다. 그러나 그 즐거움에 홀려 逸脫하는 법이 없다. 즐거움에 취하여 逸脫하면 第2의 화살은 苦受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제2의 화살을 받지 않는 것이 불교신자인 것이다. 

 

          # 末羅族의 우물

 

 어느 때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末羅族의 領內를 여행하다가 '도나'라는 婆羅門 

의 고을에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釋迦族의 출신 沙門修道者 瞿曇이 많은 비구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저놈의 가짜 沙門들에겐 물도 먹이지 말자."  하고  우물 안에 풀이나 겨를 집어넣었다.

 붓다와 비구의 일행이 마을 안에 들어와 붓다는 길에서 떨어진 한 나무 아래 앉아시자 阿란에게 말했다.

 "아란아,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너라." 아란은 드릴 말씀이 없다는듯 딱한 얼굴로 말하였다.

 " 大德아, 지금 우물은 이 마을 사람들이 풀이나 겨를 집어넣어 우물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물을 길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저 가짜 사문들에겐 물도 먹이지 말자'고 그렇게 했답니다."

 그러나 붓다는 굳이 아란에게 물을 길러 가라고 명했다.

 아란은 곤란했지만, 붓다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물로 갔다.

 우물가에 가 보니, 그 우물은 펑펑 솟아오르는 물 때문에 저들이 던진 풀이나 왕겨 따위는 벌써 다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늘하고 맑은 물이 흥건히 우물 속에 고여 있었다. 아란은 경탄해 마지 않았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아까는 풀이나 왕겨에 묻혀 있었는데 붓다가 물을 길어 오라고 명령하니 풀이나 왕겨 따위는 다 씻겨가고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희색이 만면한 아란이 물을 길러와 그 始末을 얘기했더니 붓다는 偈로서 대답했다.

 "물이 만약 늘 있다면 우물이 있어 무엇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