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론의 개혁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고도의 도시국가였고 민주주의 아래 번영을 누렸지만 이러한 민주정치가 완성하기까지에는 역시 수많은 정치적 변천을 겪어야 했었다.
아테네는 이오니아인이 정주하여 건설한 포리스이며 초기에는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族長적인 욍을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주로 귀족이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중해 연안의 교통이 발달하고 상공업과 노예매매가 성행해짐에 따라 평민들의 경제력이 신장되었고, 지주계급인 귀족의 권력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심해져서 그 사이에 끼여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소위 僭主라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개 명문출신이었는데, 비합법적인 지배자로서 그 지위가 세습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 크레이스테네스가 오스트라키자인의 제도를 설치함에 따라 참주의 출현을 유효하게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귀족 평민 양파의 싸움을 평민의 의뢰에 의하여 조정하는 자도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아테네에 나타난 솔론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이루어 놓은 여러가지 민주적 개혁은 특히 '솔론의 개혁'이라 하여, 아테네의 민주정치 발전사상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솔론은 먼저 민중의 경제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즉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을 금지하고, 일체의 부채를 무효로 했다. 이것이 소위 <重荷 해제>이다. 또 그때까지의 문벌에 의한 참전권상의 차별을 폐지하고, 재산의 대소에 의하여 정치적 발언권의 대소를 부여하는, 이른바 재산정치의 제도를 정했다. 이는 보다더 완전한 민주정치에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귀족은 물론 시민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 말기의 대표적 절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國制>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솔론 자신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 나는 민중에게 충분한 권리를 주었다. 그 명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빠앗지 않고 또 덧붙이지 않았다. 권력과 재산을 가짐으로써 존중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애 써 부당한 취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양편을 위하여 강한 방패를 들고 일어섰으며, 어느 편에게도 부당한 승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 나는 이러한 일을 법의 힘에 의하여 강제와 정의를 조화시켜 가며 약속한대로 이룩하여 놓았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정의를 적용하였고, 비천한 자에게나 고귀한 자에게나 평등하게 계률을 작성하였다.
물론 그리스의 민주제도란 고대의 노예제도 위에 서서, 자유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훌륭한 입법정신이 있었음을 알 때, 인간의 이성이란 얼마나 일찍 꽃피었으며, 그에 비하여 그후의 진보가 얼마나 늦은 것이었던가를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조개껍질의 追放
고대 그리스는 하나의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 각각의 도시는 독립된 정치체제의 도시국가(포리스)로 집합되어 있었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트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시국가는 언어, 종교, 호메로스의 시, 델포이의 신화, 올림피아 등에 의하여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를 잃지 않고 있었다.
포리스는 처음에 왕을 받들고 있었다. 그것을 동양에서 보는 전제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원시사회의 족장이 발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경이 되자, 귀족의 집단이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다시 더 나아가서는 경제 상태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힘이 강해졌고 귀족과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에 의하여 시민의 권리가 보호되었고 그들도 또한 국정의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주적 움직임과는 반대로 사회의 혼란을 틈타서 독재적 권력을 참주(튜라노스 = 타이란트)라는 것도 나타났다. 타민족에 있어서는 이러한 요소가 성장하여 중앙집권적 독재 국가를 이룩하기 마련인데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은 희랍에서는 참주의 존재란 오래도록 인정을 받지 못했다. 두드러지게 세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민주정치에 위험한 요소라 하여 배척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유시민에 의한 비밀투표로 거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은 부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정치가의 이름을 사기그릇조각, 조개껍질 등에 기입하여 투표했다. 종이는 아직 이집트에서 수입될 정도였고 그 값은 매우 비싸서 쓰지 않았다. 이것을 오스트라키자인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조개껍질의 추방이라고 할까. 본래는 오스트라콘(도자기)에서 생겨난 말이니까 '陶片追放'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오스트라키자인은 아테네의 크레이스테네스에 의하여 제도화된 것이다. 오스트라키자인이 포리스의 민주정치를 수호하는 방파제의 구실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포리스를 언제까지나 포리스 단위로 분립시키고 강력한 통일국가의 성장을 방해한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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