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디우스의 매듭
페르샤의 싸움을 전후한 시기는 그리스의 황금시대였다. 특히 아테네는 번영의 정점에 달하여 있었으나, 곧 스파르타와 대립이 격화하여 전후 22년에 걸친 페르포네소스 戰役이 발발하였다. 기원전 4세기 전후는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의 분열 항쟁이 가장 격심하던 시대였다. 처음에는 스파르타가, 후에는 테에베가 유력했는데, 만성적인 전쟁상태로 말미암아 농업은 황폐하고 도시국가 내부에서도 당쟁의 결과 다수의 시민이 망명했으며 화폐경제가 진전됨에 따라 빈부의 차가 심해졌고 금전에 팔려가는 傭兵제도가 유행하는 등, 도시국가의 생활은 급속도로 허물어져 갔다.
이 무렵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 북방에 있던 마케도니아인이었다.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 왕 피리포스 2세가 그리스에 침공하자,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위기를 외치며 아테네 테에베의 연합군을 결성케 했으나, 별 효과도 없이 격파 당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 희랍이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다. 이 피리 포스 밑에서 젊은 사자, 알렉산드로스는 차츰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자꾸만 군사를 동원하여 영토를 넓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계에는 한정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정복의 여지를 남기시지 않을 작정일가!"
피리포스 2세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눈을 동쪽의 대국 페르샤로 돌렸다. 마케도니아군의 파랑쿠스(전투집단)는 페르샤군을 짓밟고 침략의 손을 넓혀갔다. 소아시아의 서안 프리지아골디움을 함락시켰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그곳 신전을 찾아가자 신전 앞에 복잡한 매듭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는 옛날 현자로 이름높던 골디우스왕, 욕심을 부린 죄로 딸이 황금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왕 미다스의 아버지가 맺은 것으로, "이것을 푼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될 것이다." 하는 神託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참 동안 매듭을 보고 있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한칼질로 이를 잘라버렸다.
"나야말로 아시아의 왕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군사를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서 나일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다음 발길을 동쪽으로 돌려 알베라의 싸움에서 다리우스 3세를 격파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전차에 육박해서, 그가 넘어뜨린 페르샤병의 시체로 말미암아 페르샤왕의 전차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기원전 330년, 마침내 페르샤를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는 또 동으로 진격했다. 인도로 그리하여 인더스강가에 다달았다. 장교나 사병이나 신들린 것 같은 그의 정복욕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 강은 이미 세상의 끝이라 하며,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땅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나에게는 이미 정복할 땅이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비론에 개선하여 그리스와 오리엔트에 걸친 대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했으나, 그것으로써 모든 사명을 다한듯,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골디우스의 매듭을 자른 칼이 그의 목숨마저 자른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그리스인은 헬레니즘시대를 새로이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포리스적 특징을 가진 순수한 그리스문화를 세계 제국의 각지에 분산 보급하고 동시에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진실로 그리스적인 것이 상실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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