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벗에 대하여

如岡園 2006. 3. 29. 23:19

 

 같은 사회적 처지에서 같은 목적이나 취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 어울리기 마련이다. 이 때에 벗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벗을 삼다','벗하다','벗을 트다'의 말들은 사람들의 만남에서 서로 허물없이 친하게 사귀게 되고, 그럼으로써 서로가 서먹서먹한 높임말을 쓰지 아니하고 터놓고 정답게 지내는 사이임을 일컬음이다.

 벗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로는 '친구','동무','우인','붕우(朋友)','붕지','붕집(朋執)','동료','동지'따위가 있다. 이 가운데에서 동무라는 말은 어려서부터 친근하게 지내온 벗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의 하나였으나 광복 후 조국의 분단과 더불어,북쪽에서 이른바 공산주의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라는 뜻을 강조하여 이 말을 나이의 위아래가 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쓰기를 꺼리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벗의 관계를 말하여 준 최초의 대표적 기록은 '삼국사기'인데 여기에서 6세기 후반기의 원화(源花)와 화랑(花郞) 등 청소년의 모듬살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화랑은 그 수양 방식으로 서로 도의를 닦는 일(相磨以道義), 서로 시와 노래를 즐기는 일(相悅以歌樂), 명산과 대천을 찾아 즐기는 일(遊娛山川 無遠不至))을 들었다. 이 모듬살이에서의 서로의 관계는 바로 벗의 관계다. 여기에 새로운 유교 불교의 정신이 가미되어 원광법사의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가 화랑들의 이념이 되었는데 이 중에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交友以信)'가 벗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유교의 덕목으로 삼고 있는 삼강오륜의 하나인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다(朋友有信)'와도 같은 뜻의 말이다.

 

 벗을 사귀는데 있어서의 주요 요건은 '(1) 믿음  (2) 사랑과 공경  (3) 책선(責善)과 충고  (4) 도타운 정의(情誼)'라 할 수 있다.

 벗이라면 응당 서로가 서로를 믿고 한평생을 두고 길이길이 공경함을 한결같이 하여야 한다.

 율곡은 '격몽요결'의 <접인장(接人章)>에서 무릇 사람을 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나이가 자기보다 20년이 위일 때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섬기며, 10년이 자기보다 위일 때는 형으로 섬기고, 5년이 많아도 공경해서 대접한다고 했다.

 책선(責善) 또한 벗을 사귐에 있어서의 주요한 요건인데, 책선이란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충고하는 일이다. 책선과 충고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행실이 바르고 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숯이 검정 나무라는 격이 되어 책선이나 충고가 먹혀들어 갈 리가 없는 것이다.

 '벗따라 강남간다'고도 하였고,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벗을 생각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있으면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은 벗 사이에 서려있는 도타운 정의(情誼) 때문이다. 벗과 떨어져 있으면 자주 안부를 묻고, 아름다운 술을 보아도 벗을 생각하는 게 옛사람들의 벗에 대한 정의였다.

 

 '논어'에서는 사귀는 데 있어 유익한 벗 세 가지(益者三友)와, 해가 되는 벗 세 가지(損者三友)를 들어 말하기도 했는데,  정직한 사람(友直), 성실한 사람, 견문이 많은 사람(友多聞)은 유익한 벗이고, 편벽된 사람, 남의 비위만을 맞추어 주는 사람(友善柔), 말만 잘 둘러대고 실속이 없는 사람(友便柔)은 해가 되는 벗이라고 하였다.

 불경에서는 선우(善友)와 악우(惡友)를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선우란 선지식(善知識)과도 같은 말로 좋은 벗을 일컬음이다. 좋은 벗은 "천성이 우둔하지 않고 총명하며 슬기로워서 악견(惡見)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瑜伽師地論)"하였고, 이러한 벗을 사귀면, "첫째는 고락을 같이하고, 둘째는 위하여 이(利)로써 거두어 주고, 셋째는 위하여 과거의 행위(本業)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넷째는 위하여 인자한 마음 가엾이 여겨준다(善生子經)"고 하였다. 악우란 악지식(惡知識)과도 같은 악한 벗을 일컬음이다. 악한 벗이란 "첫째는 속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도 겉으로는 억지로 벗인 체 하는 사람, 둘째는 그 앞에서 좋게 말하지만 배후에서는 나쁘게 말하는 사람, 셋째는 다급한 일이 있을 때 그 앞에서는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듯 가장하지만 배후에서는 기뻐하는 사람, 넷째는 겉으로는 친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음모를 일으키는 사람(六方禮經)"이라 하였다. '속 각각 말 각각' '겉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속담과 같은 말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벗은 가리어 사귈 필요가 있는데 한결같이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편벽된 일이니 착하면 따르고 악하면 고쳐 착함과 악함을 모두 내 스승으로 삼으면 된다고도 하였다.

 벗을 지나치게 가려서 사귀고 또 걸핏하면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절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벗을 가리거나 벗을 탓하기보다도 언제나 자기수양이 앞서야 한다. 벗이 딱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에는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우정이다.

 

 벗 사이에 공(功)이 되는 일과 허물이 되는 일이 있으니

 공이 되는 일은

 (1) 어진 벗을 친근히 하면 일공(一功)이요,

 (2) 음란한 벗이 청하여도 놀이하는데 좇지 아니하면 일공(一功)이요,

 (3) 벗의 허물을 보고 충성된 말로 고하고 착한 일로 인도하면 십공(十功)이요,

 (4) 죽은 벗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면 삼십공이요,

 (5) 빈천하였을 때의 벗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면 삼십공이요,

 (6) 벗이 그 아내나 아들이 부탁한 것을 저버리지 아니하면 오십공이라 하였다.

 허물이 되는 일은

 (1) 벗이 그 아내와 아들이 부탁한 것을 저버리면 오십과(五十過)요,

 (2) 죽은 벗과 비천하였을 때의 벗을 저버리면 오십과요,

 (3) 한 오랜 벗을 가벼이 끊어버리면 이십과요,

 (4) 음란한 벗을 따라 놀고 희롱하면 삼과요,

 (5) 한 구차한 벗을 싫어하면 삼과요,

 (6) 벗과 실없는 말로 시시덕거리며 부모 처자를 들먹이면 삼과라 하였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에는 벗을 사귀는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1) 뜻이 같은 사람이 만일 성의로써 먼저 와서 사귐을 청하거든 즉시 가서 사례하라. 문벌이나 재주가 비록 나만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만한 마음을 내어 사례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2)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장기 바둑이나 놓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 서화 기예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

 (3)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4) 벗을 사귀는 자는 이미 안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안되고, 의심을 버리지 않아서는 안되고, 조그마한 혐의를 없애버리지 않아서는 안된다.

 (5) 벗을 사귀는 도리는, 가까우면 그를 바로잡아주고 ,멀면 그를 칭찬해주며,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를 생각하고, 환란이 있으면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

 (6) 일마다 미봉책을 써서 부딪는 곳마다 파탄이 생기게 하는 자는 곧 재주없는 소인이다. 그는 새로 알게 되는 사람을 농락하기 때문에 몇달도 사귀는 벗이 없다.

 (7) 평생 친한 벗은 중간에 혹시 소식이 끊어졌더라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가 서로 만나게 되면 반갑게 해야 하고 서먹서먹하여 무정한 듯해서는 안된다.

 (8) 어릴 때 친한 벗을 장성한 뒤에 혹 까닭없이 서로 소원하게 되는 자가 있으니 이같은 자는 천박한 사람이다. 이들은 빈천할 때 서로 버릴 것임을 반드시 알 수 있다.

 (9)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너나들이 하여서는 안된다.

 (10) 오늘날의 이른바 벗들은 걸핏하면 서로 욕설을 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성명을 파자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침범하기도 한다. 추하고 패악한 말을 마구 주고받음으로써 인륜도덕을 무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친밀한 벗인 양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집안의 패자요, 나라의 난민이요, 명교의 죄인이다.

 (11) 처음 사귈 때 친애함이 없음은 서로가 받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귄 지 오래 되어 각기 상대방의 과실을 알고 혹시 규잠(規箴)하면 크게 비위를 거슬려 사귐이 비로소 등진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겸허함을 귀중히 여기고 시종을 삼간다.

 (12) 열살이 더 많아 노형(老兄)이라 일컫는 이를 볼 때에는 반드시 절을 하는 것이 옳다.

 (13) 남과 처음 사귈 때 비록 마음에 든다 해도 지기(知己)라고 일컬어서는 안되고, 사귄지 오래된 사이에는 마음에 좀 거슬린다 해서 갑자기 절교를 논해서도 안된다.

 (14) 한가지 일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일마다 남을 의심한다면 어찌 양우(良友)이며 길사(吉士)이겠는가.

 (15) 험악한 사람의 심리는 남의 우호(友好)를 미리 시기하여 반드시 이간해서 서로 떨어지게 하려 한다.

 (16) 친지가 상을 당했을 경우 거리가 멀면 위문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고 거리가 가까우면 직접 가서 조문하라.

 (17) 좋은 시절이나 명절 때에 벗들이 즐겁게 놀기 위하여 주식대를 추렴하자고 하거든 인색하거나 피하거나 억지로 응낙하거나 하지 말라. 만일 가난해서 제공할 것이 없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구차하게 마련하여 가난을 숨기려고 하지도 말며, 나는 준비됐다고 해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조소하지도 말라.

 (18) 평소 사랑하고 존경하는 벗의 편지는 찢거나 더럽히거나 휴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삼가 날짜를 적어 깊이 간직했다가 떨어져 있을 때 보고 싶거나 죽은 뒤에 감회가 있거든 수시로 그 편지를 펼쳐 읽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19) 한번 오가고 나서 벗을 책망하는 사람은 그 벗삼는 도리를 알만하다.

 (20) 내가 부유하고 학문도 꽤 좋아하는데, 평소 절친한 친구 중에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나에게 빌려 달라고 입을 여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인간이 아니고 다만 '인(吝)'이라는 한 글자에 묻혀 있을 뿐이다.

 이 모두 벗을 사귐에 있어서 바람직한 일들을 자세하고도 간곡하게 들어 말한 것이라 할 만하다.

 

 옛글에 '同師曰朋 同志曰友'라 하였다, 곧 같은 스승을 모신 벗을 '朋'이라 하고, 뜻이 같은 벗을 '友'라는 것이다. 三綱五倫에서는 朋友有信이라 하였으니 朋으로서의 벗이든 友로서의 벗이든 벗 사이에는 믿음이 至上의 덕목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벗을 사귀는 일도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람으로서 벗보다도 오히려 자연의 다른 사물들에서 벗을 찾기도 한다. 사람의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가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일컬음이지만 자연 사물의 벗은 세상 일을 초월한 자기 홀로의 경지에서 가까이 즐기는 사물을 일컬음이다.

 

                                                                                                       김  재  환  편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