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말(言語)의 품격

如岡園 2006. 6. 14. 08:44

 언제부터인가 젊은 세대 간에 모임 시각을 알리는 게시물에 '오후'라는 낱말 대신 '늦은'이란 말을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다. 이르테면 오후 5시에 모이는 시각의 지정을 '오후 5시'가 아니라 '늦은 5시'라는 것이다.

 '늦은 5시'라면 그 시점이 언제인지 막연하기 짝이 없다. 5시보다 늦은 것인지, 또 상대적으로 '이른 5시'도 있는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는 시각의 개념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아나로그 시계로 12시간씩 시계 바늘이 두 바퀴가 돌도록 되어 있어 같은 수치의 시각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표시함이 불가피한 것은 不問可知다. 그리하여 서양에서는 A.M (라틴어 Ante Meridien의 약자, before noon의 뜻) P.M (라틴어 Post Meridien의 약자, after midday의 뜻)으로 구별하고 있고 우리는 12支로 표현되는 12시간 중에서 낮시간 '午時'(11시-13시)의 한가운데인 '正午(12시)'를 기점으로 하여 그 앞시간 대를 '午前', 그 뒷시간 대를 '午後'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전통적 시각 개념을 무시하고 '늦은'이라는 불명확한 新造語를 만들어내어 무비판하게 쓰고 있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말에도 족보가 있고 품격이 있는 것이니 그것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다고 하여 무작정 그것을 몰아내고 표현이 부정확하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을 만들어 쓴다는 것은 말을 황폐화시키는 행위이다. 영어에 있어서도 라틴어나 희랍어를 수용하여 풍성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음식'이나 '식품'을 대신하는 말로 '먹거리'라는 말을 만들어 쓰면서 애국자연하는 일도 꼴불견이다. '먹거리'라는 말은 우리말의 造語法에도 어긋난다. 조어법에 맞게 '먹을거리'라고 하여도 재료라는 뜻이 있으므로 '음식'이라는 말을 대신하기에는 의미상으로 적절하지 않다. '의복'이나 '옷'이라는 말을 제쳐두고 '입거리'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니 우리말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남는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겨 두어야 할 일이 있다.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특히 이 시대 혁신세력의 전유물은 더욱 아니다. 은나라 탕왕도 목욕하는 물그릇에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을 새겨 놓고 매일 자기를 새롭게 하지 않았는가. 다만 그 '日日新'하는 데는 앞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리를 알아내는 '溫故知新'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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