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경로석의 명암(明暗)

如岡園 2006. 6. 24. 00:27

 禮라는 것은 질서로 하는 일이며 질서에는 윤리에 대한 질서와 계급에 대한 질서가 있다.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윤리에 관한 질서다. 질서 있는 생활을 하자면 공경을 주로 하고 화목한 것에 힘쓰야 한다.

 대중 교통수단인 버스나 전철에 경로석이 마련되어 있다. 젊은이들이 경로석이라 표시되어 있는 좌석에 앉으려면 그 자리가 설령 비어 있다손치더라도 공연히 송구한 마음이 든다. 어른을 공경하는 전통 문화에 젖어 살아 왔고 그렇게 교육받아 왔던 결과에서 비롯된 미덕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이면 왜 특정한 장소를 정하여 경로석이라 표시하여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느냐에 있다.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심어 보자는 행정적 배려에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만일 경로석이 아닌 곳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발상이 인다면 어쩔가 하는 기우가 앞선다.

 본심에서 우러난 공경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로석의 표시가 던져주는 효과가 과연 어떤 시각으로 자리매김 될가 하는 염려가 앞선다. 도덕이나 예절은 자발적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진정한 도의심의 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세상을 개탄하여 세속을 비웃는 태도는 청년들의 반역성만을 조장할 따름이다.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어른에 대해 억지 존경을 강요하는 것도 젊은이의 성격을 그르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른이 서 있는 것을 모르고 무심코 좌석에 앉아버린 젊은 학생을 무작정 나무라는 어른의 졸속한 처사에 분개하는 젊은 학생을 두고 예절을 모르는 요즈음 젊은이들이라고 속단해 버리는 것은 어른의 무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없는 일을 명령으로 따르게 한다면 어떤 일도 성의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른된 자의 교양이 젊은이로 하여금 스스로 부정을 수치로 알고 정의를 찾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1990. 5. 21. 항도일보 鄕關散筆.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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