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아버지의 초상(肖像)

如岡園 2006. 6. 5. 17:40

 목숨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할 것을 원하고 죽은 뒤일지라도 자식의 몸을 지킬 것을 원하는 것이 부모라고  '부모은중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렇틋이 어버이는 자식에게 있어 잊지 못할 존재이고 그 표상성 또한 강인하다.

 부모 중 어머니가 무한대의 대지(大地)라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길을 인도하고 빛을 주는 등불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과 같은 존재이며 엄격함과 공정성의 상징이요, 한 집안의 가장이며 보수와 전통의 상징이다.

 "아버지의 생물학적 기능은 아들을 그 무력한 동안에 보호하는 일로서 그 생물학적 기능이 국가에 계승되고 나면 아버지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만다."고 러셀은 말하였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아버지의 기능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아버지가 되기는 쉬웠지만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인가!

 

 유년 시절의 아이에게 있어 아빠는 지상 최고의 존재로 부상하여 있게 마련이어서 작은 집일지라도 우리 아빠가 가장인 우리집이 대궐 같고, 소형 승용차일지라도 우리 아빠의 차가 최고로 좋은 차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의 아이에게 있어 아빠는 최고이기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욕망이 단순하고 순진하여 바라는 것 또한 대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아이는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작용하여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아버지에 반항하며 성장한다.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자는 한 사람의 인간이 되지 못한 채 죽는 것과 같다고 하였지만 직업적인 전문가 혹은 생활인으로서의 유능한 아버지와, 가정에서의 자상한 남편 또는 아버지는 양립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아버지는 갈등하고, 지탄받는 고립무원의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이효석은 '석류'에서 아버지의 한 표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는 쓸쓸한 집안에서 돌부처같이 침묵하였다. 반백의 머리에 턱에 주름살을 접고 온종일 늙은 앵무새만큼도 말이 적고 서툴렀다. 돌같이 표정이 없고 차다. 개차반의 소행에 대하여조차 한마디의 책망도 없었다. 모든 것을 긍정하고 굽어만 보는 조물주의 의지와도 같이 엄연하였다."

21세기의 아버지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태반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버지의 한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 나 역시 아버지가 되고 또 내 아들이 손자를 낳아 아버지가 된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 있는 지금의 입장에서 이미 고인이 된 내 아버지의 초상을 그려본다. 어쩌면 그것은 먼 훗날 내 아들이 그려볼 나의 초상화에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1909년 부지런하고 고집스러운 中庶人 농민의 7남매 중 외동 맏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초기 兒名이 '金萬年歲'였다. 천년만년 나이로 장수하였으면 하는 소망에서 그렇게 이름하였을 것이다. .......중략......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신교육을 받으려고 1922년에 00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신교육을 통해 대중을 각성시키고 계몽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했던 義明義塾을 1912년에 일제가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했던 학교였다. 일제의 통감정치 하의 신교육 시대라 결혼을 한 성인도 있었고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읽었거나 자치통감을 배우다가 입학한 학생도 있었던 시대였으니 그 당시의 교육 풍토로 보아서는 그 나름대로 먹물깨나 묻힌 셈이 된다. 먹물깨나 묻혔으니 흙을 파서 살아간다는 것이 못난 짓이 되고 그렇다고 일제 치하에서 붓대 놀려 가며 면서기라도 한다는 게 아무나 하는 일이며 그렇게 쉬운 일인가. 차라리 학교 문전에라도 이르지 않았드라면 조상 전래의 문전옥답을 가꾸어 농토라도 늘려갔으련만 이도저도 아닌 반거치기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나 이제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당시 추세는 유학을 하건 돈 벌러 가건 너도 나도 일본으로 가는 것이 진출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의 유학은 특수층의 자녀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태반의 경우는 무작정 건너가 노동력을 팔거나 하수인으로 고용되는 일이고 그 중에서도 탄광 근로자 모집에 응하는 것이 비교적 손쉬운 방편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탄광 근로자 모집에 응하여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갔더란다. 그러나 그 탄광 근로란 게 어디 내 아버지 같은 약골 샌님이 감당할 일이었겠는가.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매맞고 하는 그 곳은 인간지옥이었다는 걸 먼 훗날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중략......용케도 북해도 탄광에서 탈출하여 하코다데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하카다를 거쳐 3년 동안 오사카 일원을 전전긍긍하는 사이 외동아들을 객지로 떠나보낸 할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구월심 아들 걱정이었더란다.

 그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간청에 못이겨 진출의 나래를 접고 귀국을 하고 말았더랬는데 그 뒤부터가 문제였던 게다. 농사를 지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객지로 떠도느니 가만히 집에만 있어 준다면 농사는 당신께서 짓겠다는 할아버지의 간청이었지만 자기 할 일을 못 찾고 놀고먹는다는 것이 한창 인생을 살아갈 나이의 젊은 사람이 어디 할 짓이었겠는가. 촌읍의 우체국 직원으로 배급소 서기로 도정 공장의 경리로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일을 했지만 특별한 직업 의식이 없었던 모양으로 나의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엄격한 권위로 무장한 엄부로서의 위대한 아버지가 되지는 못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유일한 재산으로 짊어지고 왔다는 궤짝만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양산도 창부타령 육자배기 신고산타령을 이웃의 부러움 속에 들어가며 내가 자라온 걸 생각하면 아버지는 소박한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제목은 모르지만 '청노새 안장머리 알성급제 소원성취 금방울에 이름걸고 고향으로 돌아올제 내아들아 반가워라 부모님 아들되어 ......' 와, '에헤---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일세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지화자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하는 노래를 즐겨 부르셨는데, 멋모르고 따라 불렀던 것이 지금도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 미소가 머금어진다.

 직업적 생활인으로서의 아버지는 무능한 분이었지만 온정어린 자상한 아버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벼농사를 지어 놓은 한보들 너른 논에 가을날 날아드는 참새 떼를 지키느라 하루 종일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어린시절 어느날, 장문 나들이 길에서 돌아오면서 사들고 온 센베이 과자 한 봉지는 父情의 향기가 아니었던가. 어린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은 항상 따뜻했고 아버지에게서는 항상 향긋한 과자 냄새가 났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것이 권련 냄새였음이 추인되었지만 친애의 父情이 후각으로 그렇게 묻어났는지도 모른다.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그 나름으로 우리 가정에 대업을 이루었다면 내 나이 여덟 살 해방이 되던 해에 대청이 딸린 4칸짜리 기와집을 일구어 낸 일일 것이다. 일제가 벌인 이른바 대동아 전쟁의 막바지, 식민지 조선의 산하는 피폐하고 양민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기에 일본에서 목수 일을 배워 멋들어진 집을 짓는다는 대목을 데려다가 흙벽이 아닌 하얀 석회 벽으로 단장한 기외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 당시 농촌 사정에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용기와는 다른 무모하고 저돌적인 일면도 있는 사람으로 아들인 나는 인식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학교 성적통신표를 내밀었을 때 입에 익은 일본말로 "모두 甲이군." 하고 대견해 하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중학교 때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크게 건드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면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결국 아버지의 평생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관련된 일인데, 학교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하여 수업 도중에 집으로 쫓겨간 울분을 못참아 아버지에게 대들었더니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인간적 자존심을 크게 건드린 결과가 되었던지 그 때 나는 정말로 무서운 아버지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했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J시로 객지 공부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의 한계를 알고 진작 날개를 접고 고향에 있는 학교로 되돌아 왔던 일은 어쩜 아버지에게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책무를 통감케 하여 이후 나의 대학 입학을 기점으로 농사꾼으로 분골쇄신한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 뿌리 없이 떠도는 사람은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허무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자식을 품에 두고 길러 보호하고 가르쳐 가업을 잇게 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 전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외동아들이라는 입장에서 일본 진출의 꿈을 접고 반거치기로 일생을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아버지가 그나마 보람을 느끼며 살아갔던 시절이 있었다면 60회갑을 지나고 내가 생활 근거지로 자리잡은 B시에서 보낸 돌아가시기 까지의 20수년의 만년의 세월이었던 것같다. 노년의 나이래도 가난한 학교 선생 아들에 얹혀 마냥 놀고만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로 그래도 유식한 복덕방 영감의 신분으로 꽤나 경제적 수입을 올려가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그 시절 대 도시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가 대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면서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로서의 인간적 진면목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또 내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기능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니, 만사는 자기가 직접 당해 봐야 속사정을 안다고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늘상 한 집안에 살면서도 없는 듯이 있었고 있는 듯이 없었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존재하였고, 곁에 있어 남들이 어려워 하고 부담스러울 듯싶은 곳에는 어느새 흔적을 감추었다. 禮에서 우러나오는 辭讓의 마음에 투철했던 소이(所以)였다.

 

 나는 이제  내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소임이 끝나가는 시점이 되어 나 자신을 되돌려 생각해 본다. 내가 아들이었을 때 나의 아버지가 좀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항상 불만스러워했는데 지금 나는 그런 내 아버지의  절반에도 못미칠 아버지로서의 성적표를 받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플루타크 영웅전은 아비 없이 자라면 위대한 인물이 되기가 어렵다는 말을 극구 부정하고 있지만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속담처럼 아버지의 영향은 좋은  점에서건 나쁜 점에서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 아들에 미칠 수박에 없으니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상냥하고 다정하신 나의 아버지 ! 

  승부욕을 심어주지 않아 인생살이의 여러 경쟁에서 손해 본 것도 있습니다만 사람답게는 살아가라는 뜻은 심어 준 고마움에 너끈한 정이 서려듭니다. 

          (2005.12.10. 길 5호.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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