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가 푸른 하늘을 이고 스산한 바람결에 흔들려 가슴을 휘저어 놓다가 이울고, 은행잎이 황금빛의 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가을은 이미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난 후다.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계절이 바뀌어 들면 공연히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니 가을 소리, 가을 경치, 가을 냄새를 맡고서야 무슨 감회가 없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 생활의 계절임을 실감하고 독서에 뜸을 들여야겠다는 교과서적인 淸秋의 소감을 피력했지만, 가을이 우리들에게 끼쳐 주는 지배적인 정서는 아무래도 비감과 회고와 상념의 정회가 아닌가 싶다.
"오동에 바람 이니 벌써 가을인가 / 꺼져가는 등불 밑에 귀뚜라미 눈물을 짜개질 하는 밤 / 누군가? 나의 서러운 한 권의 시집을 소중히 읽어 벌레 먹지 않게 할 이 / 삶은 애처러워 창자 곶추 서는데 / 차가운 비 타고 찾아오는 어여쁜 얼아! / 가을의 무덤 속, 나는 죽어 포조(鮑照)의 시를 외고 피도 한스러워 천년을 푸르리라." 조선조 선조때 사람 고취당 이현(李賢)이 가을을 접하여 읊은 '추래(秋來)'라는 시다.
비단 시인의 감성이 아니래도 추풍이라든지 낙엽이라든지 벌레소리, 그 중에서 밤새도록 머리맡에서 간단없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소리는 세월의 덧없음과 비애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학교 문턱을 나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스프게 하는 것들' 하면 '아, 그것!' 하고 탄성을 발하는 세대가 있다. 체험 속에 있는 소재들을 회상하여 향기와 음향, 감촉에 이르는 감각을 동원하고 리듬이 있는 문체 속에 낭만과 서정성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가미시켜 자못 환상의 경지로 몰아넣는 슈낙의 인생을 바라보는 달관된 시선에 매료된 탓이리라.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양광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 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날아가는 한 마리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빈 밭과 밭, 바이얼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툴기의 깃털........" 가을이 되면 문득,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생각나는 것은 이런 구절에 시선이 머물렀던 탓이었을까?
가을은 무성했던 나뭇잎이 가랑잎으로 떨어져 울부짖고, 폭양으로 천지를 달구었던 양광이 점차 엷어져 서글픔을 더해 주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삼라만상이 영글어 수확을 가늠질하는 자리에서 오는 허탈감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공허가 심정을 자극함으로써 오는 안타까움의 한 현상이나 아닌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이 훌쩍 떠난 빈 강의실에서 이같은 가을의 서글픔을 느끼곤 한다. 그나름대로 알알이 영글어 떠나버린 빈자리이겠지만, 至善, 至純, 至高를 입버릇처럼 뱉아버린 파장이 행여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는 데 있어 도리어 장애 요소가 되고 있지나 않을지........
인생길이 소망스럽게 열려가고 생의 보람을 찾고 있다는 먼 소식이라도 있어, 가을이 몰고 오는 상념을 기름지게 하고 공허의 한 자락이 메꾸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이 가을에 와서 더욱 간절하다.
여강 김 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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