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지금 것보다 전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생각, 그리고 오늘 눈으로 보아서 그리 신통할 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얼싸안고 지나치게 애지중지하는 것도 문제다. 앞선 세대가 남긴 성과를 맹목적으로 혹은 고식적으로 고수하여 추종한다면 문화의 진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처음을 찾는 것으로서 그 다음을 안다고 하지만 과거를 모두 정돈해 둔다는 것은 소유의 낭비다. 과거는 과거로서 파묻어 버려야 한다. 물레방아를 돌리고 흘러간 물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고, 이미 톱질이 끝난 톱밥을 다시 톱질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낡은 전통의 인간으로 된다.
하긴, 한 가닥 물이 흘러가고 뒤에 남은 강가의 폐허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으로서 용서할 수 있는 일이며, 생명의 싹을 내부에 갖고 있는 오래된 씨가 새 시대의 토양에 뿌려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없는 것 아니겠느냐!
나는 나 스스로 고루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하찮은 것일지라도 묵은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간수하는 습벽이 있어 곧잘 함께 생활하는 내자로부터 핀잔을 듣곤 한다.
돈을 들여 값비싼 골동품 따위를 수집하여 그 값어치를 저울질 하며 얼싸안고 혀로 핥고 한다기보다, 초라해 보이지만 자질구레한 생활 용품, 낡은 생활 도구에서 느끼는 선조에 대한 그윽한 향기,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생활을 즐기는 편이다.
특히 지금은 민속박물관이나 아니면 상술에 밝은 전통 음식점들에서나 간혹 있을 법한 옛사람들의 생활 용품, 생활 도구, 그것들이 던져주는 인상은 생활에 시달린 우리들 늙은 아버지의 얼굴 같아 정겹기까지하다. 거기에는 오늘 우리를 떠받쳐 준 조상들의 피로한 생활이 있고 지혜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활 용품들을 거두어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얻거나 사모으기 시작했다. 호박돌 ,맷돌,떡메,도구통, 도구대, 호롱, 담뱃대, 바디, 바딧집, 북, 씨아, 떡손, 다석판, 꽹과리, 징, 요령, 목탁, 퉁소, 도기, 자기, 다듬잇돌, 다듬방망이, 참빗, 홍두깨......
이렇게 비교적 덩치가 크지 않아 가정에서 간수할 수 있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챙겨 두었던 것이 짐이 되기 시작한 것은 늙어 정년을 하고 이사를 하려고 했을 때이다. 앞으로 나 스스로를 주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어갈 터인데 이런 쓰잘 데 없는 물건들을 어느 누가 알아줄까 싶어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지고 다니기로 하고 이사를 했었다. 호박돌을 장독대 옆 수돗가에 심고 떡메를 올려 놓으니 50년 전 시골집이 연상되어 고향에나 온 듯했다. 다듬잇돌은 화단에 놓아두고 난분을 얹어 분위기를 살렸다. 꽹과리와 징은 민주화 운동시대의 선동적 굉음이 연상되어 처박아 두고 싶었다.
요령(搖鈴)은 솔발(率鉢)보다 작은, 손에 쥐고 흔들어 소리내는 종으로 불가에서 법요를 행할 때나 상두꾼의 종잡이가 흔들어대는 것인데, 손자 손녀애들은 그걸 두부 장수 종이라 해서 실소를 머금고 처박아 두고 말았다.
돌절구에 쓰여지는 큰 절구공이가 필요하여 혹시 옛날에 쓰던 것이 없나 싶어 여러 곳에 수배를 하였더니 홍두깨와 더불어 옛날 것은 사라진지 오래고, 기계로 정교하게 깎은 절구공이가 재래시장 대형 그릇점이나 관광지에 있어, 실용성을 벗어난 호사취미로도 전통 생활 용품이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구나 싶어 대견하였다.
지난 날의 생활 용품, 생활 도구를 활용한 실제 생활은 여건이 허락된다면 호사취미로 더욱 좋다. 그렇찮아도 우리 집에서는 설 추석 같은 명절에는 호박돌에 떡도 쳐서 만들어 먹고 집에 전해 오는 생활 도구들을 활용하여 때때로 강정이나 두부를 손수 만들어 먹기를 좋아한다.
그런 중에 또 꼭 하나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 무쇠로 된 큰 가마솥이었다. 장독대 옆에 가마솥을 걸 만한 공간도 충분하였고 정원수 가지치기한 나뭇가지만 해도 火木을 충당할 수 있었기에 쓰레기 소각 겸해서 무쇠솥을 가열하여 메주콩이나 두부콩을 삶는다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고 운치 또한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남비, 주전자, 알미늄솥, 전기밥솥 등 온갖 편리한 조리기구가 갖추어진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 투박한 무쇠가마솥에 장작불을 느긋이 피워 삶아낸다는 일은 상상만 하여도 푸짐한 무엇이 있다. 우리 전통의 풍습에서 솥은 부엌의 대표적 용구로서 때로는 살림살이 자체를 상징한다.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할 때 부뚜막에 솥부터 걸었던 것은 살림살이의 시작을 표상한다. 이때의 솥은 에누리없이 무쇠솥이었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나는 기어이 큼지막한 무쇠가마솥을 하나 구입하여 아궁이를 만들어 걸었는데, 문제는 그 무쇠솥을 길들이는 데 있었다. 무쇠는 철에 탄소가 들어 있는 합금으로, 빛이 검고 바탕이 연하며 강철보다 녹기 쉬워 주조에 알맞으므로 솥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지만, 산화철이 되어 녹슬기가 쉽다. 알미늄이나 돌이나 스텐리스스틸에 비하면 이런 점에서 젬병인 셈이다. 무쇠솥이 솥의 구실을 잘하려면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주물 제조과정에서 묻은 검은 잿덩이를 벗기고 놔뒀더니 벌써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새 무쇠솥을 길들여 사용하던 세대의 사람도 거의 사라져 가는 현실이어서 그 방법을 물어 볼 곳도 흔치 않았다. 왕겨에 불을 지펴 사흘을 묻어두라고 하지만 대도시 한복판에서 왕겨를 어찌 구하며 구한다고 한들 어떻게 불을 지핀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청솔가지 솔잎을 삶아 하루 정도 울궈낸 다음에 들기름으로 닦고 또다시 돼지기름으로 닦기를 여러 번 반복하라기에 그렇게 작정하고 청솔가지 잎을 찾으려니 그것도 막막하였다. 아무튼 어려운 과정을 거쳐 우리 부부는 무쇠솥을 길들여 쓴 적이 있다.
새 것일수록 좋은 것이 있고 묵은 것일수록 좋은 것도 있다. 무쇠솥은 잘 길들여 오래오래 쓸수록 검은 색으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이다.
우리들이 써 왔던 자질구레한 생활 용구, 초라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생활, 낡은 생활 도구일수록 우리네 사람을 닮아 있다.
사물의 처음을 찾는 것으로서 사람은 다음을 알게 되는 법이다. 지난 날과 꼭같은 생활을 이어갈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지혜, 그런 생활 도구,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상생활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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