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축 중에서 개만큼 사람과 가까이 지낸 동물도 없을 것이다. 요즘 와서는 애견 인구도 늘어 개를 두고 감히 가축이라느니 동물이라고 일컫는 것이 불경스러울 정도로 견공(犬公)의 위상이 올라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개는 인간과 함께 오랜 생활을 해 오는 동안 인간과 거의 동일시되어 왔다. 그리하여 사람이 자식을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는 애칭도 생겨났고 개를 조상으로 생각하는 견조설화(犬祖說話)가 있기도 하다.
개는 영리하고 신통하기도 하여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개도 사흘을 기르면 주인을 알아본다'는 속담이 생겨난 것도 우연은 아닐 정도로 개는 사람을 잘 따르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기도 하며 인간이 개를 버려도 개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 여러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헌신하는 충복의 상징이요 용기와 보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는 때로는 구박과 멸시와 버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간과의 동일시에서 오는 역작용의 한 현상으로 못됨, 미움, 저질, 천덕꾸러기로 비유되어 비천함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같은 개의 용도는 예부터 집지키기(番犬), 사냥(獵犬), 길안내, 호신 등의 역할뿐만 아니라 보신의 식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 '삼복조(三伏條)'에는 파를 넣고 푹 삶은 개고기를 구장(狗醬)이라 하여 여기에 닭과 죽순을 넣어 끓여 먹고 땀을 흘리면 무더위를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허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병후 원기 회복에는 황구(黃狗)가 특효라 하여 상등품으로 치며 황구로 빚은 무술주(戊戌酒)를 공복에 마시면 기력이 좋아진다는 기록도 있다. <동의보감>에서도 개고기가 오로칠상(五勞七傷)을 보하고 위장을 튼튼히 하며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상중절양(傷中絶陽)과 음위불기(蔭萎不起)를 다스려 양기를 북돋운다고 하였으니 개고기를 먹는 우리네 풍습은 그 뿌리가 깊은 바다.
견권(犬權)이 신장된 유럽의 개는 이미 도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독을 지키는 것이고 보면, 개는 애정의 대용물이 되어 인간을 고독으로부터 방어하는 존재물이니, 개를 잡아 먹는다는 우리네 문화를 어찌 이해할 것이냐.
"......개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바보같은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고 한 이상(李箱)의 "권태" 맞다나 우리네 개는 그 용도가 다목적이었던 게 분명한데, 의리를 지킨 개의 무덤이 있고, 삽살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이야기도 없으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작정 개를 잡아먹은 것이 아니니 서양사람 개사랑에만 얺혀 다닐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애완견과 구별하여 보신탕으로 먹을 것은 먹고, 애완견이나 의견 (義犬)으로 대우할 것은 대우하여 기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우선 개에 대한 용어부터 정립해야 한다.
우리말 '개'는 갇>갈>갈이>가이>개로 변천한 말이고, 한자어로는 '견(犬)'과 '구(狗)'가 있다. '犬'은 큰 개를 이컫고 '狗'는 작은 개를 일컫는다고 일설에는 말하고 있지만, 犬과 狗의 용례를 비추어 보면 犬은 狂犬, 軍犬, 猛犬, 食犬, 愛犬, 野犬, 獵犬, 鬪犬, 吠犬, 黃犬, 番犬, 犬馬, 犬猫, 犬牙, 犬羊, 犬吠 등으로 개를 통칭하는 말이고, 狗는 狗황, 狗膽, 狗屠, 狗肉, 狗黃, 老狗, 屠狗, 走狗 등으로 개를 잡는 일이나 약재 혹은 식용으로 먹는 일을 두고 이른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는 '犬'이 내포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식용으로 하는 개는 '狗'가 내포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구분하여 쓰면 되리라고 본다.
개타령은 이쯤해서 끝내고 이제 나의 애견(愛犬) 사육기(飼育記)를 말해야겠다.
나는 본래 개를 싫어한다. 인간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 우선 싫고, 가정적으로 많은 식구를 거느려야 했던 사정에서 사람을 수발하는 데도 힘이 드는데 짐승에게까지 수발을 든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어쩌다가 우리 집에 개를 가져다가 기르면 비루나 말코병이 들어 크지를 못했는데,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범띠라서 그렇다고들 하지만 나의 내심은 애시당초 개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근래에 나는 개 한마리를 기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달래'라는 이름의 이 개는 코커 스파니엘(Cocker Spaniel) 영국계 순종이었는데, 손자놈의 외갓집에서 기르기로 작정을 하고 작년 추석날 비행기편에 실려 온 것인데, 수렵을 겸한 애완용인 이 개의 속성상 아파트 실내에서는 기를 수 없는 개여서 되돌려 보낼 수도 없고 하여, 비교적 터가 너른 재래식 주택에 살게 된 우리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인 이름; 김 윤재, 동물 이름; 달래, 생년월일; 03년 4월 20일 생, 품종; Cocker, 성별; 牝, Color; Buff>. 이렇게 신상명세서가 밝혀진 수첩과 함께 '달래'를 억지춘향격으로 인계받고부터 문외한의 애견기르기는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주인님! 저를 다정스럽게 대해주세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저보다 더 당신의 친절에 감사하지는 못할 겁니다. 당신이 저를 때리려 하실 때 제가 당신의 손을 핥는다고 회초리를 들지는 말아 주세요. 제 가슴이 산산이 부서지고 마니까요. 인내와 이해심으로 절 가르치신다면 저는 더욱 빨리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제게 자주 말을 걸어 주세요. 당신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음악입니다. 당신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제 꼬리는 반가움으로 요동칩니다. 춥거나 비가 올 때면 집안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전 이미 야생동물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난로 가 당신의 발치께에 앉게 해 주세요. 그건 특권이 아니라 제겐 더없는 영광이니까요. 비록 당신이 변변한 집 한 채 갖고 있지 못해도 저는 얼음과 눈을 뚫고서라도 당신을 따르겠어요. 전 따뜻한 실내의 보드라운 베개를 원치 않아요. 당신만이 저의 신이고 저는 당신의 열렬한 숭배자이기 때문이죠. 제 밥그릇에 신선한 물을 채워주세요. 그릇에 물이 없어도 원망은 않지만 저는 갈증을 당신께 표현할 수 없거든요. 제게 먹이를 주세요. 그래야만 제가 튼튼히 뛰놀며 당신의 지시를 따를 수 있잖아요? 또 제 몸이 건강해야 당신의 옆을 따라 걸으며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다해 지켜드릴 수도 있고요. 사랑하는 주인님! 하나님이 제게서 건강과 시력을 거둬 가시더라도 절 멀리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며 영원한 휴식을 위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끝으로 저는 제 마지막 호흡까지도 느끼면서 당신 곁을 떠날 겁니다. 제 운명은 당신의 두 팔 속에서 가장 안전했었다는 기억과 함께..."
이런 '강아지의 기도문'은 애견 사육의 계율이 되어 우리 두 부부를 '달래'를 위한 뒷바라지 일로 꼼짝 못하게 묶어 버렸다. 개를 위한 치약, 칫솔, 샴푸를 비롯하여 귀 청소액과 간식용 검까지 갖추어 본격적인 애견사육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참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다.
벌써 중년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유치원을 다닐 때 등살에 못이겨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다가 개장수에게 몰래 팔아버리고 눈물을 흘리게 한 이후 그 짐스러운 개는 다시 기르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인데, 늘그막에 이 무슨 망녕이냐 싶으면서도 열심히 먹이를 주고 목욕을 시키고 운동을 시켜주어야 했다.
풀숲에 있는 토끼나 꿩이나 여우같은 짐승을 내몰아 주인에게 사냥을 시키고, 총을 쏘아 잡으면 물어다 주는 사냥개의 속성을 핏속에 지니고 있는 이 작은 개는 황갈색의 부드럽고 긴 털에, 축 늘어져 너펄대는 귀가 거추장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거동이 재발라 마냥 묶어두기가 어려워 하루에 한두 차례씩 바깥으로 몰고 다녀야 했는데, 처음엔 이것이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실상은 내가 개를 기르지 않을 때 나는 이른 아침 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미워하였다. 하찮은 짐승을 애지중지하는 꼴불견이 역겨웠던 것이다. 정년을 마치고 생활이 한가해졌다고 하더라도 나 스스로 꼴불견의 애견족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죄 없는 짐승을 마냥 우리에 가둬 놓고 기를 수도 없어서 나도 그 예의 애견족의 꼴불견으로 '달래'를 몰고 나섰는데 이게 문제였다. 뚜벅뚜벅 으젓한 걸음으로 산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귀엽게 발발거리며 종종걸음을 치는 게 아니라, 주인의 힘이 부치도록 마구 뛰기가 아니면 주둥이로 길 가장자리 풀섶을 뒤지는 것만으로 일관하고 보니 할 짓이 아니었다. 때로는 "코카다. 귀엽다."하고 개의 족보를 알아 찬사를 보내는 중학생 또래 아이들도 있지만, 제멋대로 방뇨 방변을 해대는 데는 주위가 민망하여 몸둘 곳을 몰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할 수 없이 '달래'의 출신 성분을 몰수하고 아예 똥개처럼 기르기로 작정을 하고 개집을 지어 한데잠을 재우고, 때때로 넓은 텃밭에 풀어놓아 제멋대로 놀게 하였더니 천지만지를 뛰어다니며 함부로 뒤지어, 주변의 고양이 똥까지 주워 먹더니 어느 날은 피똥을 누며 아예 먹이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아뿔사! 이질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쫄랑대며 재롱을 부리던 달래는 축 늘어져 병색이 역연했다.
나는 천성이 무람없는 데가 있어 집의 내자가 몸이 아파도 퉁명스럽게 방임하기가 일쑤인데, 하찮은 강아지인데도 이 지경이 되고보니 방치할 수가 없었다. 집 안사람마저 서울 아들 딸네 집에 가고 없는 처지라 혼자 달래를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변을 채취하여 현미경 검사를 하고 모니터에 꿈틀거리는 세균을 가리키며 득의만면한 수의사의 진단 처방 치료에 무조건 복종할 수 밖에. 한번 병원 출입에 거금 3만 5천원씩 몇 차례 병원출입을 하다보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라면 의료보험이라도 있어 기천원에 끝날 치료인데 개는 개라서 의료보험 혜택도 없었으니 그럴 수 밖에.
처음엔, 애써 가져온 개를 어찌 되돌려 보내겠느냐고, 우리집에 기르자면서 부쩍 열을 올려 목욕도 시키고 양치질도 해주고 담황색의 탐스런 털도 다듬어 주면서, 외출해서는 '달래' 걱정으로 오매불망하던 아내는 날이 갈수록 마음이 변하여 정들기 전에 남을 주자는 쪽으로 작정을 하고 있고, 개 주인 손자놈은 할애비 할매 안부보다 '달래' 안부가 궁금해 개 인사를 앞세우는 가운데 '달래'는 출생 10개월을 맞이하고 있다. 암컷이어서 생리와 발정의 기미도 있는 것 같지만 강아지의 출산, 산후조리까지는 죽어도 하기 싫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현재의 작심이다.
다만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두 부부만 호젓하게 사는 형편에, 짐승이긴 하지만 기왕 한식구가 되고 말았으니 '달래'를 입양 손녀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침 기존의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족제도가 개판(?)으로 짜여져 가고 있는 모양이니 우리집도 강아지 '달래'를 손자 김윤재의 여동생 '김달래'로 호적에 편입함직도 하지 않은지 ! ( 동인지<길 2호>. 2004.6 )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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