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이 보편화 되기 전에도 여행에 대한 꿈과 동경은 있었고, 한번쯤 세계여행을 하게 된다면 꼭 가 보고싶은 곳이 단연 유럽,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가 아니겠는가 한다. 역사와 교황청의 도시 로마는 그렇다치고, 이탈리아 하면 대뜸 떠오르는 곳이 나폴리, 밀라노, 베니스, 프로렌스이고, 산타루치아와 곤돌라의 뱃노래가 귀에 쟁쟁할 것이다.
그만큼 베니스는 여행객에 있어서 매력이 있는 도시다. 아드리아해의 여왕이며 177개의 운하와 118개의 섬, 그 사이에 400개의 다리가 놓인 물의 도시 베니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베니스로 통칭되고 있지만 베네치아(Venezia)가 현지 발음이다.
우리 교수부부팀 여행단 일행이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여행한 것은 2000년 7월이었다. 도쿄 런던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그 융프라우요흐를 거쳐 막바지 여행지인 이탈리아 반도의 길목인 밀라노에 안착한 것은 7월 8일 저녁 9시 30분, 유럽 중남부 여름철의 긴 하루해가 이제막 꼬리를 감추고 있는 시간이었다.
밀라노 시내의 호텔 콩고르드에서 1박을 하고 베네치아 관광에 앞서, 일찌감치 밀라노 시내 관광길에 나섰다. 기원전 7세기에 성립되어 로마의 속국이 되어버린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중심 경제수도이며 인구 230만의 대도시로 한국의 대구와 규모가 흡사하여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란다. 2차대전 끝 무렵 해외로 도피하려던 무쏘리니를 붙잡아 처형했다는 로레토 광장을 지나 재빠른 말씨의 현지 가이드 말 맞다나 허벌나게 서둘러 밀라노의 상징으로 시가지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두오모 성당 광장에 이르렀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한 마리아나센티 두오모 성당은 14세기 후반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성된 이탈리아의 대표적 고딕양식 건축물로 숲의 인상을 주는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갈레리아 아케이드 쪽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니 정말 삼림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건축물이다. 지붕위 130개의 첨탑 중에서 가장 높은 108.5미터 높이의 금박의 마리아상은 바야흐로 아침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성당을 장식한 조각상만 해도 2천개가 넘는다고 하니 그 거대한 스케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마같은 역사도 없고 피렌체같은 낭만도 없고 베니스같은 아름다움도 없는 도시라고 하지만, 이탈리아라이프 스타일을 밀라노만큼 능수능란하게 팔아먹는 도시도 없다고 한다.
'밀라노 패션'이라는 말까지 낳은 세계 최첨단 패션이 선보여지는 갈레리아! 두오모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왼쪽의 아치형을 한 유리천정의 아케이드가 이른바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의 갤러리아로, 부티크나 카페 서점 등이 늘어서있는 번화한 아케이드였지만 이른 아침시간이어서 한적하기만 했다. 이 곳을 빠져나간 곳에 그 유명한 스카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 있었는데 일류 연주가들이 모여 있는 오페라의 전당이라고 하지만 외관은 그냥 수수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오히려 스카라 극장 입구를 대각선으로 빗겨난 공터에 세워진 레오나르드 다빈치상이 인상적으로 뇌리에 박혀 왔다.
그 다음으로 들런 곳이 카스텔로 광장 옆에 있는 고성 스포르체스코 성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참가하여 지어진 성채를 겸한 건축물로, 그 안에는 몇 개의 주제로 구분된 시립박물관이 있다고 하지만, 베네치아의 관광길에 쫓기어 내부 관람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고성 둘레를 몰려다니며 찌리리 찌리리 찌찌직 찍찍 하고 떼거리로 우짖는 새떼 소리만 무심하였다.
밀라노 동쪽 2시간 남짓한 거리의 베네치아로 발길을 재촉한 것은 2000년 7월 9일 12시, 멀리 흰 눈을 머리에 인 알프스산맥의 준령들을 먼빛으로 바라보며, 다듬지 않아도 붓끝모양 수관이 가지런한 이탈리아 특유의 관목이 울타리처럼 도열한 포도밭 평야를 달려 물의 도시 베니스, 아니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 앞 선착장에 도착했다.
177개의 운하와 118개의 섬,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아드리아해의 여왕 베네치아! 교통수단은 모두 물에 떠 있어 지상을 달리는 자동차가 한대도 없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13~15세기에 걸쳐서 베네치아는 동서 무역에 따른 해운업의 번영으로 전성기를 맞아 발전하였단다.
산타루치아 역 앞 선착장에서 바포레토라는 수상버스를 전세내어 S자형 대운하를 가로질러 베네치아 관광의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으로 항해했다. 끈적끈적한 땀하나 배어나지 않는 지중해 특유의 습기없는 여름 기후에, 밝은 햇살 푸른 하늘 아래 넘실대는 대운하의 물결을 가르고 수상버스 바포레토는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깐깐한 목소리로 집요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로컬 가이드의 해설을 곁들여 '공화국의 귀부인' '이탈리아의 진주'라 호칭하는 베네치아의 풍광을 캠코더에 무한정으로 실어담았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서기 452년 경 인공으로 이루어진 갯벌 섬이란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 시기 아드리아해를 떠돌던 피난민의 일단이 118일만에 갈대숲이 우거진 바다 갯벌을 발견하고 섬을 형성하였다는데, 외부에서 흙을 가져와 매립한 것이 아니라 물에 썩지 않는 야자수를 나이테 모양으로 진흙 속에 박아 진흙을 모아 바른 것이 콘크리트처럼 굳어 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지면은 일정한 높이로 물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1년에 1센티미터씩 갈아앉는다고 하니 언젠가는 베네치아는 수상도시가 아니라 수중도시가 될 운명의 섬이기도 하다.
대운하 주변에는 베네치아 고딕의 최고 건축이라고 하는 카도로를 비롯해서 우아한 역사적 건축물이 붉은 벽돌색으로 수없이 늘어서 있다. 아치형의 아름다운 리알토 다리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다리와 활기에 넘치는 어시장으로 성시를 이룬 모습이 캠코더의 망원렌즈에 잡혀 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0분 항해 끝에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 성당(Basilica San Marco)이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둘레 11킬로미터의 작은 섬 베네치아!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길을 이리 꺾어돌고 저리 바꿔들며 소운하의 구름다리를 건너 옹색한 식당에 들어섰다. 비위에도 맞지 않는 느끼한 스파게티에 찻잔 밑바닥을 맴돌게 분량이 적은 카푸치노로 늦은 점심을 따지고 되돌아 나와 찾아간 산 마르코 광장은 널찍한 광장임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닿을듯 관광객으로 붐볐다.
지금은 도서관으로 사용하지만 세계 최초로 동전을 화폐로 쓴 돈을 만들었기도 하고, 포켓용 핸드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출판국 건물, 나폴레온이 탐을 내 훔쳐가지는 못하고 그 모양을 본떠 파리 그랑팔레 광장에 모방건축하였다는 산 마르코 광장의 건축물의 내력을 설명하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전달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의 물결로 일렁이는 광장은 그래서 더 유명한지도 모른다.
뭐니뭐니 해도 산 마르코 광장에서 주목해야 할 건물은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 두오모 성당이다. 9세기 이집트에서 운반되어 온 성 마르코의 유체를 모시기 위해서 세워졌다는 산 마르코 성당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있었단다.
카토릭 세력권에 들어 있던 베네치아 입장에서 동방의 이교도들과 무역을 하려니 교황청의 견제가 심했다고 한다. 그런 교황의 탄압을 완화하고자 베네치아의 중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인의 유해를 모셔다가 성당을 지어 카토릭을 신봉하는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아주 헐값에 샀는데 운반 도중에 이교도들에게 뺏길 것을 두려워 해 이슬람 교도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 속에 숨겨 들여 왔다는 일화를 가이드가 덧붙였다.
이 성당은 수차례에 걸친 복구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데, 성 마르코의 유체를 모셔드리는 과정을 4장면으로 구성, 건물 정면 출입구 상단 외벽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조형하여, 13세기 베네치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지고 왔다는 4마리의 靑銅馬像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부의 둥근 천장에 그려진 모자이크화도 아름답고, 중앙제단 뒤쪽에 있는 팔라도로(Pala d' Oro)는 휘황찬란한 보석류가 박혀 있는 제단화로 유명하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종루는 망을 보기 위한 탑이었다고 하는데, 높이 100미터 망루까지는 엘리베이트가 운행된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나부끼는 깃발을 단 종각에서 울려퍼지는 미사의 종소리가 아름다워 캠코더에 실어담았는데 광장의 여러 풍경들과 조화된 한 컷의 근사한 동영상물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좁은 섬으로 토지가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일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으므로 항상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특히 베네치아시 심장부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은 관광객이 집중되어 있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만 모두들 즐겁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들이어서 축제하는 잔치마당을 방불케 하였다. 사람수 만큼이나 많은 비둘기떼에 둘러싸여 비둘기를 모이 주어 데리고 노는 천진한 어린이들, 종소리에 귀 기울이어 명상하는 해맑은 피부의 백인 소녀, 밝은 웃음으로 정답게 손잡고 배회하는 신혼부부... 카메라의 렌즈가 머물 곳은 너무도 많았다. 그 중에서 뒤뚱뒤뚱 걸음걸이 하는 두살배기 어린애의 재롱을 흐뭇해 하며 데리고 노는 모녀의 장면이 마음을 끌었다. 캠코더를 의식하고 포즈를 잡아주는 선심에 렌즈를 고정하고 "봉 조르노", "그랏제"를 연발하였다. 천진무구란 이런 것이 아닐까 했다.
광장주변 레스토랑에서는 옥외살롱을 열어 가설무대에서 실내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서 즉흥댄싱을 연출하는 어느 관관객 중년남녀가 있었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빙 둘러 서서 그 춤에 저절로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도 이탈리안다운 문화적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싶었다.
또 하나 베네치아 관광에서 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 베네치안 글래스이다. 근방의 무라노 섬이 베네치아 글래스로 유명한 곳이라지만 글래스를 만드는 간단한 과정은 산 마르코 광장 근처에서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불에 달군 유리를 엿가락 늘어뜨리듯 비누방울 놀이하듯 하면서 글래스를 제조하는 숙련공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첨가하는 금속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는데 모래 자갈 소다 순금 등을 뜨거운 물에 넣어 퍼지게 하면 투명하고 영롱한 유리그릇이 된다고 한다. 휘황찬란한 색깔의 글래스 하나를 망치로 때려도 깨지지 않는 강도에 눈이 둥그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마르코 성당 옆으로 베네치아공화국의 정부였던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이 있었다. 이것이 유명해진 것은 베네치아공화국의 청사였다는 사실보다 이 궁전과 연결된 '한숨의 다리' 때문이다. 이 다리를 경계로 하여 한쪽은 행정 사법 업무를 처리하는 화려한 궁정 건물이고 다른 한쪽은 어둡고 침침한 감옥이었으니,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이 다리를 두고 저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라는 시에서 "나는 베니스에서 / 양 손에 궁전과 감옥을 쥐고 / 한숨의 다리 위에 서 있었다....."라고 읊은 데서 '한숨의 다리(Ponte dei Saspiri)'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자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어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한숨의 다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옥에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탈출에 성공한 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카사노바란다. 영화 '카사노바'는 바로 이 두칼레 감옥의 탈출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인 것이다. 이 탄식의 다리는 대운하에 면한 해안도로에서 관광하는 것이 제격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그 다리밑으로는 소운하의 우중충한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고 행복한 신혼부부로 보이는 관광객을 실은 곤돌라가 곤도리에레의 노래를 흘리며 유유히 지나가고 있어 야릇한 심정이 일었다.
관광안내 팜프렛이면 반드시 베네치아의 명물로 등장하는 곤돌라는 원래는 베네치아 시민들의 중요한 발이었으나 이제는 관광용으로만 사용될 뿐이란다. 달콤한 세레나데를 들으면서 즐기는 밤의 곤돌라 여행이 베니스 여행의 극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현장에서 실감되는 곤돌라 여행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시궁창이나 다름없다 싶은 소운하의 우중충한 바닷물, 해수에 해풍에 천년을 부대껴 상처난 건물외벽 사이 해로를 따라 오르내리는 곤돌라 여행은 차라리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동경의 세계만큼 황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2박 13일의 유럽여행 마지막 여정인 피렌체와 로마로 가기 위해 미련을 두고 베니스 근교 안토니호텔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지만, 4계를 작곡한 비발디의 고장, 원나라에 귀속하여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폴로의 나라 베네치아의 풍광은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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