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성년식- 冠禮

如岡園 2009. 4. 28. 13:58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 지나지 않았던 자기의 존재 가치와 위상이 사회적 국가적인 것으로 격상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년식은 인간의 일생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년 의식은 전통적으로 관례라 하여 冠婚喪祭의 4禮 중 하나로 중시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5월의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하고 만 20세가 된 젊은이를 대상으로 행사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다만 성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 풍속에서 관례는 어린이에게 어른(成人)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서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인 것이다.

 이때 갓이라는 것은 어른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머리에 얹는 모자를 의미한다. 幅巾 草笠 紗帽 帑巾 등등의 모자가 쓰이었던 것이다. 관례를 행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구상유취(口尙乳臭)의 동자(童子)이지만 이 관례를 치르고 나면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어른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도 물론 이 관례 후에라야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면 거기에 따르는 권리가 부여되지만 또 책임도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관례의 의의인 것이다.

 관례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행해졌던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다른 외국에서도 이른바 성년식(成年式, initiation)이라고 하여 관례에 해당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원시시대부터 미개한 민족이나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민족에게 한결같이 있었던 통과의례(通過儀禮)이다.

 우리나라의 관례는 중국의 영향으로 그 의식이 복잡하게 되었지만, 중국 영향 이전에 이미 성년의 의식 같은 것은 있었다. 그 예로서는 신라의 원화(源花), 또는 화랑제도가 일종의 관례의식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관레가 언제 발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대사회에서도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녀의 결합인 혼례가 자연발생적으로 내려오다가 의식화(儀式化)한 것처럼, 관례도 성장과정에서 생리적인 변이에 따라 어른이 되게 하는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 성년의 표징을 관(冠)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이른바 관례(冠禮)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관례를 행할 적정시기는 관례를 받는 자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른이 된 시기, 곧 생리적인 변환기(일종의 사춘기)에 관례를 베푸는 것이 원칙이다. 대체로 이 시기를 15~20세로 보고 이때에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열 살 전후에 관례를 행하고 있었다. 이는 조혼(早婚)의 풍습에 따라 관례도 조기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관례는 빈(賓, 주례자)의 주관 아래 거행되며, 이때 주된 의식은 삼가례(三加禮)이다. 삼가례는 初加 再加 三加의 세 절차가 있다.

 초가에서는 받는 자의 쌍상투를 합해서 쪽찌고 망건에 관을 씌우고, 삼규삼(三규衫)을 벗고 심의(深衣)를 입힌다.

 재가에서는 초가에서 쓴 관건(冠巾)을 벗기어 사모(紗帽)를 씌우고, 심의 대신 조삼(早衫)에 가죽띠(革帶)를 띠고, 계혜(繫鞋)를 신긴다.

 삼가에서는 복두(幅頭)를 씌우고, 난삼에 띠를 띠고 신을 신긴다.

 이 세 의식은 일정한 격식에 따라 엄숙하게 진행되며, 매번 빈이 축사를 낭독한다. 삼가례가 끝나면 사당에 가서 고하고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관례의 절차가 끝난다.

 여자의 경우 관례를 '계'라고 한다. 나이 열다섯이면 약혼을 하지 않아도 계를 하는데, '계'라는 것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는다는 뜻이다.

 

 이같은 관례는 의식이 복잡하고 삼가 의식에서 오는 服의 삼중적인 부담이 상당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치르게 되어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문헌에 명시된 전형적인 의식을 따르기에 힘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삼가의 절차를 일일이 밟지 않고, 관의 경우는 망건(網巾) 복건(幅巾) 초립(草笠)을 한꺼번에 거듭 씌움으로써 삼가(三加)를 대신하고 옷은 관복이나 도포 혹은 두루마기 등 편의에 따라 착용하는 것이 유행되었다.

 사례(四禮) 중에서 婚 喪 祭의 의식은 비록 변모된 형태나마 명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데 유독 관례만은 퇴색되어진 것은 관례는 혼례나 상례에 비하여 그 결과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 갑오경장에 내린 단발령과 그 이후 머리를 땋지 않고 상투를 떼어버림으로써 관례란 행사의 커다란 의의를 상실한 셈이었고, 관례가 결혼의 전제적인 행사가 되면서 혼례에 견인되어 처음에는 결혼의 부수적인 행사로 그 잔영을 얼마 동안 유지하다가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좀 더 근원적인 원인으로는, 관례는 어디까지나 양반층의 의식이었지 서민층에까지 파급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국민의 생활 속에 뿌리를 박지 못한 문화라는 것은 맥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인으로서의 자격과 의무를 부여하여 자각케 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동기부여의 통과의례는 후세교육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나이는 성년이지만 사고나 행동이 그렇지 못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형편이고 보면 성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절감케 할 수 있는 현실에 맞는 어떤 성년의식(成年儀式)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