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산격동의 자취생활

如岡園 2009. 8. 7. 12:43

 지금부터 52년 전,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좋은 대학이라는 국립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우리 14기 동기들이 대학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57년 4월이었지. 그 때는 새학기가 4월에 시작되었으니까.

 집에서 편히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행운아도 있었지만 태반은 친척집에 기숙하거나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던 촌놈들! 그 때 그 시절 자취생활의 추억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발자취였다.

 

 요즘 세상처럼 원룸이 있었던 시대도 아니고 전기밥솥, 냉장고, 라면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도회의 지리도 생리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흔한 복덕방도 있을 리 없는 변두리를 헤매다가 그래도 공부하러 다녀야 할 대학과는 거리가 가까와야 했으니까 가까스로 자리 잡은 곳이 경대교 근처 옥산동 쓰레기장 언저리에 자리한 어느 지게꾼의 판자집 아래채였다.

 말이 아래채이지 그 첫번째 자취집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수수깡으로 엮은 흥부네 집을 연상하곤 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음직한데, 그것보다 더 인상 깊은 일은 그 근처 쓰레기더미에서 기어 나온 노래기라는 고약한 벌레에 관한 것이다.

 20~30개의 마디로 된 몸통의 각 마디에 두 쌍의 보각(步脚)이 있고, 건드리면 몸 전체가 둥글게 말리는 검은 색의 이 절족곤충은 모양도 징그러운데다가 무엇보다도 고약한 노린내를 풍기고 있어서, 향랑각씨(香郞閣氏)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 기피(忌避) 곤충이었으니 손수 음식을 차려 먹어야 하는 자취생활에서 여간한 방해물이 아니었다. 이 고약한 벌레가 밥을 지어먹는 부뚜막이며 반찬그릇에 기어다니는 환경이었으니 기절초풍을 할 노릇이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것이 시골서 가져다 먹는 반찬통 속으로 기어들고 보면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찢어진 자크 자락이 그 크기로 흩어진 게 어찌 그리도 그 모양을 닮았든지 함께 자취하는 동료에게 장난질도 치다가, 경대교 건너 가교사 산언덕을 오르면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명소가 국화빵집! "시절이 하 수상하니 국화빵도 秋草로다..." 라고 한, 턱도 아닌 싯귀를 먹글씨로 한지에 써서 제멋대로 내어다 붙인 움막집의 국화빵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으리라.

 콜타르 칠을 한 송판을 비가 스며들지 않게 가로로 엇대어 외벽을 삼고, 루핑 지붕을 덮은 가교사에서 수강한 철학 강의는 수강생 태반이 100점 만점에 60점을 받았어도 명강의였다.

 '존재자로서 존재자의 제1원리의 학', '필로소피'는 앎을 사랑하는 '愛知', 그리하여 철학은 학문 중의 학문이라는 철학 지상론을 펴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계보에, 하이덱그니, 실존철학이니, 유물론이니, 사유론이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에 겁먹으면서 한 학기를 마감한 어느날 저녁, 그 마(魔)의 첫 자취방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무리 가난한 자취생활이라 해도 그런 불결한 환경에서는 배겨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새로 이사를 해 간 곳이 산격동이다.

 노동법을 전공하여 나중에 모교에서 법대 학장과 학생처장까지를 지낸 자취방 동료인 나보다 세 살 위가 되는 고향 친구가, 지게꾼인 자취방 주인의 바지게를 빌려 자취생활 도구를 담아 짊어지고 썩은 물이 흐르는 신천 둑길로 해서 침산 나무다리를 건너, 오리 길이 넘는 산격동 본동네까지 걸어서 이사했던 그날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이고 지게를 짊어진 경력이 앞선다고 그가 지게를 지고 나는 남폿불을 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 산격동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달성 서씨 집성촌인 산격동 본동네는 그래도 전통 한옥들이 즐비한 호부한 동네였다. 새로 세를 얻어 들었던 영남중학교 교사 채00 선생의 집은 제법 구색이 잘 갖추어진 기와집이었고 그 행랑채 사랑방이긴 했지만, 전문적으로 세를 놓는 방이 아니었으므로 부엌간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처마 밑 한데에 풍로와 취사도구, 반찬단지를 벌여놓고 자취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알루미늄 밥솥의 얼음을 깨고 언 손으로 쌀알을 씻어 앉혀 잘게 짜갠 장작으로 풍로에 불을 지펴 해 먹는 아침밥, 우물물을 길어 간장과 멸치를 반찬으로 하여 찬밥을 말아먹는 점심, 그것은 생명을 이어가는 젖줄이었다. 도시락까지 싸 가서 하얀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복산동 사대 본관 뒤 언덕에서 동과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며 찍은 7월 어느 점심시간의 사진 한 장을 잊을 수가 없다. 

 세계대학생평화봉사단에서 구호품으로 제공받은 1갤론들이 버터와 치즈 캔이 유일한 지방질 공급원이었다. 기본적인 반찬이 되었던 장아찌, 오그락지, 멸치볶음이 바닥이 나면 사과밭 근처 남의 채소밭에서 은근슬쩍 거두어 온 시금치며 겨울초며 하는 푸성귀에 된장 간장을 풀어 끓여 먹는 야채국이 그래도 진수성찬이다.

 지면에서 들쑥 들어 올려진 사랑방은 여름철은 그나마 좀 시원했어도 툇마루로 둘러진 양면의 영창문이 어찌나 방한에 허술하였던지 가뜩이나 냉방에 그 추운 대구 날씨의 겨울나기가 말이 아니었지만 따스한 인정이 도사려 있는 교육자의 집안이었던 것이 정다웠다. 

 자취생활도 사람의 기본생활인 의식주를 공유하는 것이니 구성원인 동거자의 인원 수와 상호간의 호불호(好不好)가 중요한 요건이다. 셋이면 반드시 하나가 따돌림을 당하기 마련이니 둘이라야 이상적이고 둘이라 해도 처지가 비슷하고 뜻이 맞아야 제격이다. 

 비교적 자취생활에 필요한 재료의 공급이 원활하고 조건이 좋았던 내 처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웠던 동거자의 부친이 수 백리 길을 걷다가 차를 타다가 하면서 등에 짊어지고 온 것이 겨우 풍로에 지필 장작개비 몇 조각이라면 함께 자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사정에서 자취생활 동거자가 몇 번 갈리고 나면 자취생활에 신물이 난다. 운이 좋으면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고...

 

 그런 산격동 자취생활 시절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철학과에 다니는 김도희라는 친구와의 만남이다. 미목이 수려한 외양에, 말없는 미소를 머금고 그야말로 사색하는 철학도의 면모, 대화를 그렇게 많이 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속으론 무한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내 가슴 속을 정신적으로 가득 채워 주었던 친구다. 

 그 시절 우리들 대학생 대부분의 옷차림이 그랬듯이 검정색으로 물들인 미제 군인 작업복 차림이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유독 그 친구가 사교성이 없는 나를 좋아하여 내 정신적 친구가 되어 주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철학자는 꼭 저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구 달성공원 이상화의 시비 앞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속에 모습을 남겨두고 그 당시 4명 뿐이었던 철학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때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으니 일부러 이름을 밝혀 본 것이다.

 그 두 번째가 1959년 9월, 3학년 때의 자취방에서 맞은 사라호 태풍을 겪은 일이다. 추석인데도 고향 집에는 못가고 처량한 마음으로 객수에 젖어 있는데, 추석날 아침부터 창밖을 때리는 거센 비바람! 영창을 바른 문종이가 비에 젖고 바람에 날려 뜯겨진 방안에서 향수에 젖어들던 일.

 인근 금호강의 상류 댐이 범람하여 불어난 강물이 홍수가 져 수몰 직전의 주인 집 가재도구를 한나절 동안 허리춤까지 잠기는 물속을 오가며 방천으로 옮겨 날랐다.

 밤이 되어 휘영청 보름달이 물에 잠긴 동네를 비추었는데 자취방 툇마루까지 차올라 넘실거리는 물 위로 떠다니는 근처 사과밭 홍옥을 건져 베물며, 이백의 풍류를 흉내 내며 물에 비친 보름달을 완상하던 일, 그때 함께 자취하던 동과 친구는 내게 제 누이동생 중매를 염두에 두었지만 불발이 되고 말았지.

 마지막 한 가지는 자취방의 식객(食客)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자취방도 따지고 보면 잠자고 밥 지어 먹으며 사람 사는 곳이니, 때로는 하룻밤 신세지러 오는 친구도 있고, 밥때에 다다라 식객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식객 가운데는 자취한 밥의 밥맛은 어떤가 하고 호기심과 재미로 한두 끼씩 식객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단골로 식객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한동안 단골로 식객이 되어버린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것이니, 여간한 손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지만 전혀 짐스럽다는 생각이 안들었으니 사람의 매력이라는 것도 묘한 것이다.

 문학 창작의 길로 나갔다면 작가로도 출세를 했을 법한 자질을 타고난 친구였는데, 그 시절 이 친구는 자취할 거리마저 공급받을 수 없어 우리들 자취생들의 자취방을 전전한 떠돌이 단골 식객이었으니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아무 부담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젊은 열정 탓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만년에 접어들어 손자 손녀를 돌보러 멀리 뉴욕과 LA를 넘나들면서 E 메일을 띄우다가, 또 바람같이 서울 바닥에 나타나 맥주 대작(對酌)을 청하는 그의 낭만이 부럽다. 아니, 산격동 자취생활 시절의 추억을 들추어 눈물겨워하는 그의 여린 마음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 생활 가운데서 1959년 11월, 3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자췻방 신세를 벗어날 행운이 찾아 왔다. 그동안 사귀어 왔던 동과 친구의 소개로 가정교사 자리가 생겼던 것이다. 동거하던 친구에겐 안쓰럽고 미안했지만, 지겨운 자취생활의 고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첫 취직의 기쁨 그것이었다.

 칠성동 북문시장 옆의 칠성여관 구석방에서 지낸, 보수없는 5개월의 첫 가정교사 생활은 어쩌면 내가 부대껴야 할 생활전선의 첫 시험장이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 4월 19일! 4.19 경대 데모대의 선두에 서서 도청까지 디밀었던 열정을 두고 나는 스스로 내 인생에 갈채를 보내곤 한다. 그 때 나는 이름마저도 거창한 대한반공청년단 경북 도 단장 김00 변호사 댁 가정교사로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데모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서는 내게 걱정을 해 주던 김변호사를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자유당의 앞잡이 신도환의 가재도구가 중앙통에서 불살라지고 있었고, 그 다음의 목표가 내가 입주 가정교사로 있는 도 단장 김 변호사 댁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주인이, 그의 처조카와 나에게 집을 온통 쓸어 맡기고 피신을 해버린 빈 집에서 조마조마한 밤을 지새웠지만 천만다행 무사안위였다.

 민심이 천심이었는데, 그래도 그 당시 김변호사는 양식이 있고 양심을 벗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1961년 3월 25일은 우리들의 영광스런 졸업식 날! 국립사대 졸업생이라면 응당 졸업 즉시 교사 발령을 내려야 했는데, 자유당 말기의 정치나 행정은 복마전이어서 돈 없고 빽 없으면 발령도 미루고 밀리다가 세상을 뒤엎은 것이 5.16 군사혁명!

 이번에는 또 병역 미필자가 되어 있어 발령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교사 발령을 포기하고 1961년 10월 1일, 공군 병과 96기로 대전에 있는 항공병학교에 입대하고 말았다. 나의 가정교사 주인인 김00 변호사가, 이런 눔의 난장판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한탄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려 들으면서......     (2009.7.1. 경북사대 14회 부산동기회 발간 伏賢입문 50주년기념집 <오륙도 파도소리>에서)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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