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양산박/ 삼촌설/ 망국지음/ 파죽지세

如岡園 2010. 7. 28. 22:08

         # 양산박(梁山泊)

 집권자의 횡포에 반항한 농민봉기(農民蜂起)의 본거지(本據地) 이름이다.

 북송(北宋)의 휘종 황제는 궁전과 만수산(萬壽山)을 꾸미기 위하여 그 정원의 장식용 꽃과 돌을 강남 땅에서 날라 오는 데 있어서 백성들의 고역을 강요하였다. 그 꽃과 돌의 행렬을 화석강(花石綱)이라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거니와 마침내 방납(方臘)이라는 요술사가 반란을 일으켜서 부호와 관리를 죽이고 다녔다.

 그 무렵에 산동(山東)의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에 송강(宋江)을 두목으로 하는 36명의 의적(義賊)이 모여 제(齊)나라와 위(魏)나라를 횡행하면서 수만의 관군과 대항하였다. 송강이 경동(京東)을 범했을 때 조정에서는 송강을 용서하여 방납을 무찌르려 했는데 송강은 해주에서 관군에게 바닷가로 몰려 부장(副將)을 사로잡히고 항복하여 처형을 당했다.

 한때는 관군이 덤비지를 못했던 농민 봉기였기에 그들은 호한(好漢)으로서 압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그들의 무용담이 과장되게 기술된 것이 소설 '수호전(水滸傳)'이다.

 

         # 삼촌설(三寸舌)

 말로써 능히 난국을 타개함을 말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얘기다. 서쪽의 강대국 진(秦)나라의 침략 앞에서 동방의 여러 나라들은 명맥을 유지하려고 갖은 지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에 조(趙)나라는 진나라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수도 한단성의 운명도 멀지 않았는 듯 싶었다. 쥐 한 마리가 전도(錢刀) 30장에 거래될 지경으로 식량사정은 핍박하여 다른 나라의 원병이 와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운명이 좌우될 판이었다. 물론 여러 나라에 구원을 청했건만 아무데서도 반응이 없는 터였다. 약육 강식(弱肉强食)하는 시대에 스스로 강대국 진의 창 끝에다 몸을 내던질만한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조나라 왕족에 평원군이라는 재주군이 있어 초나라 왕에게 몸소 구원을 청하러 나서기로 하였다. 평원군은 당시 삼천명으로 소문이 난 식객(食客) 중에서 스무 명을 추려내어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열 아홉 명까지는 인선이 되었건만 나머지 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모수(毛遂)라고 하는 이가 자청했던 바 그는 존재가 알려질 만한 재사가 아니었기에 평원군은 망설였다.

 "송곳이 주머니에 들어 있다면 그 날카로운 끝이 나타나게 마련이건만 그대는 삼년 동안이나 식객으로 있었다면서 전혀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주머니에 넣어 주시질 않았던 탓이겠습죠."

 가까스로 축에 든 그는 평원군을 따라 초나라 왕과의 동맹을 교섭하러 나섰다. 하나 조초 동맹(趙楚同盟)의 교섭이 그리 만만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래 마침내 모수가 초왕을 설득해 볼 차례가 되었는데, 초왕 앞으로 층계를 뛰어 올라가는 그의 손에는 칼집에 든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초왕은 꾸짖었으나 모수는 까딱도 않고 아뢰었다.

 "폐하께서 소인을 꾸짖어시는 건 배후에 초나라의 대 병력이 있는 덕분이올시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폐하와 소인과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이올시다. 폐하의 수명은 소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초나라만한 대국이 어찌 진나라를 피하시려는 겁니까. 초나라의 대군과 폐하 사이에 소인이 뛰어든 것처럼 진나라 군사가 또한 뛰어들기 전에 우리 조나라와 동맹을 맺아 주십시오."

 모수의 설득은 마침내 성과를 거두어 그의 요청대로 닭과 개와 말의 피가 갖추어졌다. 맹약(盟約)의 결의를 표하기 위하여 초왕과 평원군과 모수, 이런 차례로 그 피를 마셨다. 이에 총명을 자랑하던 평원군이 탄복하였다.

 "이런 인재를 내가 여지껏 몰라보다니...... 모 생원이 일단 초나라에 나서자, 우리 조나라의 국위(國威)를 구정대려(九鼎大呂)보다도 무겁게 하였다. 모 생원은 세치의 혀(三寸舌)로써 백만의 스승(百萬師)보다도 강한 셈이었다" 라고.  

 삼촌설(三寸舌)이라는 말은 이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 망국지음(亡國之音)

 망한 나라의 음악 혹은 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음탕한 음악.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에 가는 도중 산동성 북수 근방에서 참으로 신묘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영공은 그에 심취하여 거느리고 있던 음악사에게 그 가락을 베끼도록 분부하였다.

 이윽고 진나라에 당도하니 영공은 그 음악사에게 일러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고 하는 탁월한 음악사가 있어 음악으로써 학을 춤추게 하고 구름을 부른다는 명인, 그래 평공은 곧 사광을 불러다가 같이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광은 음악이 연주되자 "잠깐 기다려줍쇼! 그건 망국지음이올시다." 하고 음악사의 연주를 만류하였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는 영공과 평공에게 그 내력을 들려 주었다.

 "옛날에 은(殷)나라 주(紂)왕을 섬기는 사연(師延)이라고 하는 유명한 음악사가 있었습니다. 사연은 주왕을 위해 음탕한 악곡들을 지어 올렸거니와 주왕은 밤낮으로 그 악곡들에 홀려서 지내셨습죠. 주왕은 그렇듯이 악독한 정치를 하다가 멸망하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동쪽의 복수로 가서 투신 자살했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언저리에선 그 곡조가 들려오고 있다더니만..."

 영공도 평공도 소름이 끼쳐 다시는 그 음악을 들을 리 없었다.

 한비자(韓非子)의 십과편(十過篇)에 있는 이야기이다.

 

          # 파죽지세(破竹之勢)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듯 세력이 맹렬함을 말한다.

 삼국 중의 촉한(蜀漢)은 이미 망하고 천하는 위(魏)나라의 뒤를 이은 진(晉)나라와 남쪽의 오(吳)나라와의 대립이었다. 그래 진나라는 오나라에게 마지막 결전을 걸어 그의 대군이 오나라를 향하여 남하해 왔다. 중앙군은 진남(鎭南)대장군 두여(杜予)가 이끌고 내려왔으며 서쪽에서는 왕준(王濬)의 수군이 양자강을 타고 내려오고, 동쪽에서는 왕혼(王渾)의 군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태강 원년(太康 元年. 서기 280년) 2월, 두여는 왕준의 군사와 합세하여 무창(武昌)을 함락, 그곳에서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작전을 세웠다.

 한 장수가 말하기를

 "이제는 봄인지라 강물이 이내 충만해질 것인즉 이곳 무창에서 오래 주둔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일단 철수를 했다가 오는 겨울에 한꺼번에 쳐내려오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오."
 이 떄 두여는 잘라 말하였다.

 "아니,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 우리 군사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오. 이를테면 대나무를 쪼갤(破竹)때 두째 마디 세째 마디를 쪼개고 나면 인제 칼날이 가기만하면 자연히 쪼개져 힘을 줄 필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기세(氣勢)이오.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되오." 

 이리하여 그는 곧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그의 군사는 곧장 오나라의 서울 건업(建業. 南京)으로 쇄도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皓)는 손을 뒤로 묶어 얼굴만 내놓고 수레에다 관(棺)을 얹어 사죄(死罪)의 뜻을 나타내며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