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四知/ 乞骸骨/ 鷄肋/ 九牛一毛

如岡園 2010. 9. 7. 18:17

          # 사지(四知)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그대가 알고(子知), 내가 안다(我知) - 그러므로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후한시대의 관료는 부패해 있었는데 어쩌다 고결한 관료도 없는 건 아니었다. 제6대 안제(安帝 106~125)때 사람인 양진(楊震)도 그 중의 하나였다.

 양진은 박학(博學)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으며 관서(關西) 출신이기에 '관서의 공자'라는 찬양을 받았다. 그가 동래군의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의 숙소에 묵었을 때다. 밤늦게 그 고장의 현령(縣令, 地方長官)이 찾아왔다.

 "태수 나으리, 소인을 모르시겠습니까? 은혜를 입자왔던 왕밀(王密)이올시다."

 양진은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자기가 감찰관으로 있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를 시켜주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담을 나누었는데 왕밀은 금 열근이라는 거액을 양진에게 주려하였다. 지난 날 과거에 급제 시켜준 데 대한 보은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대의 학식과 인품을 기억하는데 그대는 나의 사람됨을 잊었단 말이요?"

 하고 양진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아니올시다. 태수 나으리. 이것은 결코 뇌물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뿐이올시다."

 "그대가 나의 예상대로 현령자리에까지 올라 주었으니 나에게 대한 보은은 그것으로 족하오."

 "더구나 이 밤중에, 알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이 방에는 지금 태수님과 소인 밖에 없으니......"

 "무슨 말이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잖소?"

 왕밀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돌아갔다. 양진은 그 후로도 고결하게 처신하여 드디어 태위(太尉, 國防長官) 벼슬에 올랐다.

 

          # 걸해골(乞骸骨)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는 자기의 뼈를 임금에게 바치는 셈이니 벼슬아치가 벼슬자리에서 하직하려 함을 말한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 지쳐 강화를 청할 무렵이다.

 항우로서도 휴전할 생각이 있어 범증(范增)장군에게 의논하였다. 그러나 범증은 이때야말로 한나라를 무찔러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매 항우는 다시 포위하고 나섰다.

 유방은 당황하여 진평(陳平)에게 의논하자 진평은 항우의 단순한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항우와 범증 사이를 갈라 놓기로 제의하였다.

 자기네 부하를 시켜 초나라 군병들 사이에다 뜬소문을 퍼뜨리자는 것이니 범증이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허튼 소문이었다.

 항우는 이내 동요하여 범증에게는 은밀히 해둔 채 유방에게 강화의 사신을 보냈다.

 한편 지장(智將) 진평은 그 사신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다 말고 능청을 부렸다.

 "범증 장군께서는 평안하시오?"

 사신은 이 느닷없는 질문에

 "소인은 범증의 사자가 아니오라 항우의 사신이올시다."

 "그래? 나는 존경하는 범증 장군의 사자이거니 여기고 후대했구먼. 하, 거 참......"

 진평은 이렇게 흉물을 떨고는 내놓은 주안상을 거두고 대접을 마구 하였다. 그 사신들이 돌아가 항우에게 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실하다 여기고 범증의 온갖 권력을 박탈해 버렸다. 범증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진 거나 같사오니 앞일은 몸소 조처하소서. 소인은 해골을 빌어내어가지고[乞骸骨] 초야에 묻히렵니다."

 이리하여 범증은 낙향하던 도중 울화로 말미암아 등창이 생겨 사망하니 그의 나이 75세.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넘어가 유일한 지장을 잃은 셈이었다.

 

          # 계륵(鷄肋)

 닭의 갈비뼈는 먹으려고 하면 고기가 적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는 데서,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할 사물을 말한다.

 후한의 유비가 한중(漢中)을 평정하고 위(魏)의 조조를 맞아 역사적인 한중 쟁탈전을 벌였을 때다. 전쟁이 수개월에 이르러 조조는 군비 군량이 어지럽혀지고 도망병이 속출, 나아갈 수도 지켜낼 수도 없어졌다. 그래서 조조는 '계륵(鷄肋)' 즉 닭의 갈비뼈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뜻을 아는 부하가 없었다.

 그런데 조조의 군병 가운데 양수(楊修)라는 재사가 있어 일찌기 어느 비문의 은어(隱語)를 풀어내는 데 조조보다 빨랐던 자다. 그는 조조의 '계륵(鷄肋)'이라는 명령에 접하자 곧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하며 동료들에게 일러 주었다.

 "한중 땅이란 마치 닭의 갈비뼈와 같아서 먹자니 먹을 건 없고 버리자니 또한 아깝다는 뜻이므로, 나랏님[魏王 曹操)께선 돌아가기로 작정하신 거라네."

 아니나 다를까, 조조는 군병을 이끌고 한중에서 철수하였다.

 

          # 구우일모(九牛一毛)

 많은 것 중의 극히 적은 것을 말한다.

 천한(天漢) 2년, 무제(武帝)의 장수 이능(李陵)은 불과 5천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무찌르러 나섰는데 기마(騎馬)조차 주어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십배의 적군과 싸우기를 10여일, 그 동안에 유리한 전황을 알리는 사자가 올적마다 천자를 비롯하여 대신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했다. 그러나 필경은 참패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죽은 줄 알았던 이능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능의 일족을 몰살하려 하였고 그에 대해서 신하들도 감히 만류를 못하는 터에 유독 사마천(司馬遷)만이 사학자로서의 안목으로 대담하게 변호하고 나섰다.

 "이능은 목숨을 걸고 국난 극복에 나선 명장이었으나 인간의 능력으로서의 극한점에 다다른 셈이올시다. 그가 흉노에게 항복한 것도 미상불 훗날 한나라에 보답코자 하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즉 차라리 이능의 공훈을 천하에 표창하심이 타당할 줄로 아뢰오."

 무제는 이 당돌한 사학자를 옥에 가두고 마침내는 궁형(宮刑)에 처하고 말았는데, 궁형이란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수염은 절로 빠지고 얼굴이 매끄러워질 뿐더러 성격조차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치욕을 참고 견디며 선친인 사마담(司馬談)의 유언대로 사기(史記) 130권을 완성하였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구우일모(九牛一毛)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내가 궁형을 당한 노릇 쯤은,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九牛一毛)가 빠진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 테지." 하고 한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