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동물이 투영하는 상징성은 문학발상의 좋은 밑거리가 되고 있다. 동물과 인간이 연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온 한국적인 동물관의 근거 위에서 우리의 예술과 문학은 예로부터 동물을 끌어와서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고소설에서 동물을 의인화한 우화소설이 번성을 이룬 소이연(所以然)도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논자(論者)는 이런 관점에 관심하여 한국동물우화소설론과 그 작품론을 펼친 바 있다.
한국의 동물우화소설은 전래의 동물우화를 바탕으로 하여 우화가 가지는 제한성까지도 초월하여 다른 고소설에 비견하여도 양이나 질에 있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소설문학으로 정립되어 있었는데 단편담인 동물우화를 장형의 소설로 변용하고 있다는 것은 동물을 통한 문학적 발상력의 뛰어남을 입증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간단없는 문학사적 흐름을 두고 볼 때 조선조 후기에 번성을 이루었던 동물우화소설의 전통이 한국 신문학 내지 현대문학 작품에서 단절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한국동물우화소설의 전통을 확인하고 현대적 맥락을 짚어 동물우화 형식의 현대소설 작품을 살펴 본 바도 있다.
본고(本考)에서는 일차적으로 동물상징의 문학적 발상의 근거를 찾고 한국동물우화소설의 전통을 살핀 다음, 동물 상징이 현대문학에서 어떻게 수용되어 있고 소설로 구상화 된 작품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고구(考究)하려고 한다.
동물에 추상화되어 있는 인간의 속성을 우의(寓意)하는 문학적 발상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물의인의 수법을 현대소설에 조응시킴에 있어 우화적 발상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게 마련이어서 현대소설에서 전통적 동물우화소설은 드물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환경에서 김성한의 <개구리> <衆生>, 정종명의 <審判>, 박양호의 <미친새>는 우리시대 동물우화소설의 수작(秀作)이라는 판단 아래 이들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함으로써 현대소설에서의 동물우화적 기법의 가능성을 입증하려 한다.
2. 동물의 문학적 발상
문학이 본질적으로 상징의 언어공간이라고 한다면 동물상징의 문학적 발상은 인간생활을 동물에 조응하여 경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상징은 어떤 추상적인 것을 대신하는 구체적인 사물의 제시이다. 특히 문학적 상징은 심상(心像)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심상이 어떤 추상적 의미를 나타내면서 한가지 의미만을 대표하도록 계속 쓰인 경우에는 알레고리적 상징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확정된 정신적 의미를 배후에 감추고 있다고 믿어졌던 시대에, 상징은 대개 알레고리적 상징이었다. 근세 이래로 사람은 알레고리적 의의를 덜 느끼므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문학적 상징은 그 심상이 더 막연하고 불확정적이며 암시적인 것이다.
또한 상징은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는 심상이라는 점에서 은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사이래 동물과 인간은 깊은 연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생활을 사물에 조응할 때 동물과의 관련성은 어떤 사물보다도 친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과 동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까이 접촉해서 살아왔고 또한 그 육체적 생리적 동질성으로 말미암아 별다른 정신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힘을 믿어왔던 원시인은 사냥 그 자체가 주술(呪術)이며, 신과 동물이 동화되면서 애니미즘을 배태하기도 했고,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 하여 동화(同化)와 상호(相互) 전신(轉身)으로 신화의 세계를 펼쳐 나가기도 했다.
동물이 인간다운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동물을 인격화함으로써 문학에 의인화(擬人化) 수법(手法)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서사문학의 세계에서 동물의 현상이나 상태가 많이 환기되는 것은, 동물에 대한 교감적인 관념의 위상, 동물 상상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의 근사성에 착안하여 인간사회의 일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데서 동물우화는 서사문학의 독특한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동물의 상태에 대한 경험적인 관찰과 인식 및 반응을 바탕으로,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발상(發想)이 동물우화를 낳게 한 원동력이다.
3. 동물우화소설의 전통
동물우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알레고리의 문학이다. 알레고리는 일차적으로 확장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따라서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상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토끼전>은 거북과 토끼라는 두 주인공의 세계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동물의인의 수법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성(理性)을 가탁(假托)한 전형적인 동물우화소설이다.
한국인의 원초적인 상상의 세계가 동물에 이르면 동물과 인간을 심성면에서 결부시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동물은 삼라만상 가운데서 인간과의 근사성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인간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뭇짐승들이 먼저 기뻐 날뛰었고, 신성인(神聖人)의 탄생을 선도(先導)하고 옹위하였으며, 위급한 경우에 처하여서는 동물이 수호신의 역할까지 떠맡기도 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거나 신비로운 힘의 소유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를 동물에 의해 표현하기도 했고, 그들 앞에 엎드려 절하기도 했다.
상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동물은 토템이나 애니미즘의 존재로 인식되었고 사람과 어울려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격체로 존재하였다.
김현(金現)이라는 자(者)가 탑돌이 할 때 만나 정을 나눈 여자가 알고보니 호랑이였는데, 여자의 집에 갔을 때 다른 형제 호랑이들이 해치려는 것을 여인으로 변신한 호랑이의 만류로 모면하였으며, 그 여인이 변신한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 장난이 심할 때 그 호랑이를 잡은 공적으로 김현은 등용되고 그 은혜갚음으로 호원사(虎願寺)를 지어 보은(報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동물과의 교혼(交婚)과 호원사 창건연기(創建緣起)와 동물보은사상을 포괄하면서 호랑이라는 동물을 의인화하여 구성한 설화로서, 동물이 인간을 위하여 목숨까지 던진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미승(沙彌僧) 묘정(妙正)이 바라를 씻을 때마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먹였더니 그 자라가 은혜갚음으로 조그만 구슬을 뱉아주어 그것을 허리띠 끝에 매어단 후로 대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간은 선악의 업(業)에 의하여 그에 상응하는 선악의 업보를 받는다는 불교의 인과응보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비록 동물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인과응보를 주제로 하는 국문학 작품의 남상의 모델이 되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생령(生靈)의 세계를 파악하려는 정신적 노력에서 동물의 문학적 발상은 이미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지(人智)가 발달함에 따라 동물과 인간의 관계양상도 바뀌게 되었다. 어떤 것은 계속 사냥물이 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인간에 의해 길러지고 또 어떤 것은 인간을 침해하여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동물의 문학적 발상도 그들의 생사, 생태, 외형, 습성 등과 관련,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현실적 이야기로 각색되어 인간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투영하는 작위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가전(假傳)에서나 민담, 우화에서는 인간사를 우의(寓意)로써 교훈하는 수단으로 원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사의 변죽을 울리며 교량적 역할을 해 온 가전은 가전 특유의 형식을 구비하고서 인간세태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풍자적 필치로 표현한 서사문학의 한 갈래이다. 계세징인(戒世懲人)의 목적성을 가지고 거북을 의인화하여 자기적 수양에 입각한 처세훈에 비중을 두고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견기이작(見機而作)할 것을 강조한 <淸江使者玄夫傳>, 창자 없는 게를 의인화 하여 속알머리없는 인간을 빗대었을 법한 <無腸公子傳>은 모두 동물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훌륭한 서사물(敍事物)이다.
또한 교훈과 흥미를 본위로 하는 우화는 설화의 한 형태이다. 동물의 행태에 가탁하여 인간생활을 기지로써 풍자하고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동물우화는 겉으로는 관습화된 동물의 성격을 내세우지만 인간 사상(事象)을 다루는 것으로 속뜻을 삼기 때문에 알레고리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나라의 전래하는 동물우화는 구토설화류(龜兎說話類), 쟁년설화류(爭年說話類), 야서혼설화류)野鼠婚說話類, 쟁송설화류(爭訟說話類), 동물형태유래담류(動物形態由來談類)로 대별된다.
설화에 나타나는 의인화 경향이 동물에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의인이란 자체가 인간 이외의 사물을 인간으로 보고 인간과 같은 언동을 부여하여 인격화 하는 것이기에 일차적으로 의인 대상을 삼을 수 있는 조건을 인간과의 근사성에서 찾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서사적 허구성을 가진 이야기로서의 민담은 시간과 공간의 확정 없이 마음대로 꾸며진 비교적 짧은 전승적 오락적 산문 형태의 서사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 가운데서 짐승이 말을 하고 사람 모습을 취하여 인간의 허점을 드러내며 훈시적 요소가 강한 것을 동물우화라고 할 수 있다.
민담으로 전승되어 오던 동물우화는 동물우화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기도 하지만 소설시대에 접어들면서 윤색되어 소설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소설이 현실 비판적인 문제에 관심했을 때 구전설화로서도 오랜 내력을 지니고 있고 겉으로는 관습화된 동물의 성격을 내세우지만 인간문제를 다루는 것을 속뜻으로 삼아 허위를 풍자하고 진실을 일깨우는 특징을 가진 동물우화를 적극 활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록으로 정착되었거나 구비로 연면히 이어 온 허다한 동물우화는 고소설이 번성을 이루면서 그 양이나 질을 소설적으로 확대하여 동물우화소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소설이 전기성을 띠고 귀족적 이상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을 때, 전래하는 동물우화에 대한 관심은 동물을 빙자한 단지 익살스런 흥미와 교훈을 주는 짧은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지만, 영,정조 이후 실학사상을 배경으로 현실비판적인 안목이 싹트게 되자 풍자주의적 수법을 가미시켜 생활을 표현하는 독창적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자 동물로 의인화된 안전장치에 힘입어 비판의식을 유감없이 표출할 수 있는 동물우화는 소설창작의 좋은 소재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 창작된 작품이 <鼠獄記> <鼠大州傳> <蛙蛇獄案> <鵲烏相訟> <토끼전> <장끼전> <섬동지전> <서동지전> <황새결송> <녹처사연회> <노섬상좌기> <메기장군전> <까치전> 등의 동물우화소설이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소설양식인 신소설이 등장하면서 <금수회의록> <경세종> <금수재판> <만국대회록> 등 신소설 작품이 나와 동물우화소설의 전통을 이어주었고,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김성한의 <개구리> <衆生> 등 현대 단편소설을 창작 발표함으로써 현대 소설로서의 가능성도 입증하고 있다.
민담 중에서 동물우화는 가장 표퓨러한 것으로 전승되는 구비문학이므로 그 기본 유형의 잠재성은 후대에 이르러 문학의 원천이 될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동물우화소설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상을 다룬다는 표현상의 제한이 따르지만 그것이 지닌 해학성과 풍자적 매력으로 인해 장구한 생명력이 있다고 하겠다.
4. 동물상징과 현대소설
(1) 동물상징(動物象徵)의 현대적 수용
동물을 끌어와서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동물의인문학의 분야는 자못 흥미 있는 문학적 발상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동물과 인간의 동질성의 천착에까지 미치고 동물에 감정이입(感情移入)이 행해짐으로써 동물의 문학적 발상은 가능해졌다.
인간은 경험을 상징으로 전환하는 능력, 즉 사물과의 조응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연상과 암시에 의해서 그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응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추상적인 것을 대신하는 구체적인 사물의 제시, 관념과 정서의 화육(化肉)이며 연상과 발견의 결과이다. 문학이 그 본질에 있어 상징의 언어공간이라고 한다면 문학적인 발상이나 표현에 있어서 상징의 가치가 원천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예술과 문학은 예로부터 동물을 끌어와서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논설한 바다.
현실에 대한 비평적 태도에 근거를 두고 골계를 지향하는 풍자, 해학, 아이러니의 문학이 동물우화소설의 본성이었다. 인간사회의 자만, 자기도취의 망상을 수반한 윤리적 결함을 하찮은 동물의 일로 표현하는 데다 동물상징의 가치의 원천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동물우화소설은 서민계급의 지배층에 대한 불신감정이나 권위의식이 야기한 힘의 횡포, 맹목적 충성심에 자기도취된 하수인의 허구, 분수를 넘어선 허욕, 어리석은 자가 빠져들기 쉬운 인간적 약점 등, 당시 사회현상의 부조리, 유교적 윤리관이 빚은 그릇된 인간상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동물의 세계로 풍자되고 있었다. 동물의 외양이나 생활습성이 세세히 관찰되고 그것을 인간사회의 한 단면에 결부시켜 의인화함으로써 다양한 인간사회의 현실문제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화라는 서사방식은 인생과 사회의 단면을 동물에 가탁하여 압축과 비유를 극적으로 제시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실의 구체적 실상을 총체적으로 인식 반영하는 데는 지장을 초래한다. 따라서 설화시대부터 독자적인 전통과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발달하여 온 동물의 의인화 수법을 활용한 서사작품은 근대에 이르러서는 위축되고 의인화 수법 역시 은유의 부분적인 형태로 흡수되거나 동물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동물의인문학으로서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지다.
동물우화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동물이며 주인공은 반드시 동물이 아니면 안되는 데다가 동물로 사건의 경위가 서술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스토리의 전개를 제한하고 있으며 의인화에 있어 반드시 동물의 습성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장애요인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은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곡절하게 반영할 수 있어도 다른 경우에 반영시키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동물우화소설이 당시의 민중이나 작가들의 소박한 자연과학적인 지식의 각도에서 출발하여 당시의 사회상에 유전되던 단순한 도덕관념과 인간적 질서를 동물에 가탁하여 표현하고 있었지만, 다기다양(多岐多樣)한 사상(事象)의 표현이나 소설이 지향하는 진지한 삶의 표현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물은 인간의 정서와 심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매개물이기 때문에 동물에 추상화 되어 있는 인간의 속성을 우의하는 문학적 발상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을 인간과 긴밀한 동질성과 친화성이 있다고 보고 균등의 관계로 인지하려는 의식이 있는 한, 동물의 문학적 발상과 상징은 지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을 상호 조응하여 동물 속에서 인간을 관조하고 인간 속에 동물을 반영시킬 뿐더러 동물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과의 한계적 교차점을 포착하여 동물인 동시에 인간인 새로운 과도적 생물을 창조함으로써 일종의 동물성과 인간상을 이중복사적으로 투시하는 표현법을 원용한 카프카적 발상법이 나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전통적 동물우화의 세계에 있어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갖가지 상황을 반영하거나 또는 진부한 도덕적 이념이라든가 권선징악적인 윤리적 교훈을 동물의 모습을 빌어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보다 자유로운 현대소설에서의 동물의 문학적 발상은 동물관념을 상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장용학의 <요한시집>은 동굴 속에 갇혀 있던 토끼가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탈출을 시도한다. 이것은 토끼가 느끼고 있는 존재에 대한 한계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이며 탕자(蕩子)가 자기 부모를 떠나는 상황과 대비된 은유적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토끼의 동굴 안에서의 삶이란 탕자(蕩子)가 부모 밑에서 편안하게 살았던 것과 비교된다. 탕자(蕩子)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평선에 매력을 느꼈던 것처럼 토끼가 무지개 빛을 보고 그 빛이 들어오는 바깥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그 동굴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토끼는 죽고 만다.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누혜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일과 토끼의 죽음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간 존재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해 보려했던 작자가 우화적 기법을 서두에 활용했던 것이다.
엄흥섭의 <番犬脫出記>는 한 알맹이의 쌀알을 주워 먹으려고 제 목숨이 고양이에게 깨물릴 줄 모르는 쥐새끼를 미련하고 가엾은 짐승이라고 여기고, 민어와 조기포가 채반 위에 널린 채 밤이슬을 맞고 있는 것을 모르고 쥐새끼나 노릴 줄밖에 모르는 고양이를 약은 듯 하면서도 미련하고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바둑이의 눈을 통해서 본 인정기미(人情機微)를 그린 작품이다.
최주사네 집에서는 한갖 애완동물이거나 번견(番犬, 집 지키는 개) 이상일 수 없는 바둑이가 자기를 길러준 유영감의 정에 집착하고 자신 때문에 유영감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며 도우다가 잡혀 죽을 운명에 놓여 탈출한다는 이 번견의 이야기는 개의 일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단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을 개에 투사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에 동물우화적 성격보다는 동물문학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채만식의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는 대머리 벗어진 왕치, 주둥이가 튀어나온 소새, 허리가 잘룩한 개미의 형태유래담을 통하여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개미, 괴퍅하고 박절하나 재치가 있는 소새, 속이 없고 빙충맞으며 희떱고 비위가 좋은 왕치의 속성이 잘 드러나도록 짜여져 있다. 언뜻 보면 동물형태의 유래담으로 보이지만 단순한 형태유래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적으로 구성을 하고 등장 동물들의 행위를 통하여 근면하고 너그러우며 낙천적인 인간형, 재치는 있으나 성미가 까다로와 박절한 인간형, 속 못차리고 공것 바라고 생색 내기를 좋아하며 비윗장 좋은 인간형을 부각시키고 있다.
김성한의 <風波>는 동물의인 내지 동물상징의 매력을 문학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소극적이며 순응적인 인간상을 배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형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던 김성한은 현실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화의 풍유나 우화의 형식을 빌려 썼던 것인데 <風波>에서는 인간의 비속성(卑俗性)을 알레고리화 하기 위하여 하잘 것 없는 이[蝨]라는 비속한 존재의 눈에 비쳐진 인간추(人間醜)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저속하고 야비한 인간사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인체에 기생하는 이를 의인화하여 혼돈의 시대에 부조리하게 자생한 권력자의 무상을 풍자하고 오만과 허세, 인간추(人間醜)가 횡행하는 시대상을 폭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물의 문학적 발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효석의 작품공간은 인간의 세계와 금수의 세계가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동물에 대한 교감, 동물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의 나귀는 허생원의 분신이고, <豚>에서의 돼지는 분이에 대치된다.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는 연민의 동물관과 함께 유리(流離)하는 민족의 고난 및 모성의 본질과 핏줄의 연대성을 한마리의 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이야기는 개짐승마저 온전히 그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일제 식민지 상황 아래 있어서의 민족의 수난사를 암시하기도 한다. 안주(安住)의 장소와 먹이를 얻지 못하고 쫓기는 신둥이야말로 수난의 민족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에 시달려가면서 다음 세대인 새끼를 끝까지 보호하는 신둥이에게서 끈질긴 생명력과 강한 모성애의 단면을 엿볼 수 있고 그것은 곧바로 미래를 위한 생식력과 핏줄의 끊임없는 지속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송하춘의 <큰즘생>은 '금강'이라는 곰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우직하지만 담백하게 살라던 어머니의 당부를 깔아뭉개고 절대로 우직해서는 안되고 제발 꾀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몸에 배어오는 금강의 생각은 어쩌면 곰의 생각이 아니라 준호의 생각이고 입장이다. 쓸개 때문에 쫓겨야 했던 금강은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준호의 처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곰의 쓸개와 인간의 양심을 상징적으로 배합시켜 양심의 문제를 조명해 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물은 인간의 정서와 심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매개물이었기에 동물에 추상화되어 있는 인간의 속성을 우의(寓意)하는 이러한 발상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수용하고 알레고리화 하는 동물의인문학을, 동물우화라는 단편담에 집착하여 아동문학적 차원에서만 다루거나, 동물의 의인화 수법이 소설로 펼쳐 나가는데 있어서의 제한성에만 급급하여 현대소설로서의 창작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동물의 의인화를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에 관한 지속적 풍자로 확대, 풍자소설로서의 한 분야를 개척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갖가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또는 진부한 도덕적 이념이나 윤리적 교훈 따위를 동물의 모습을 빌어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우화소설의 세계를 초월하여, 카프카의 작품에서처럼 동물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동물의인문학으로서의 작품세계를 펼쳐 나가는 방향이 기대할 만한 일이다.
동물이 인간과 긴밀한 동일성과 친화성이 있다고 보고 균등의 관계를 인지하려는 의식이 있는 한 동물의 문학적 발상과 상징은 지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상징적 발언을 통한 비의(秘義)의 우화소설
동물이 투영하는 상징성과 문학적 발상에서 출발한 의인화의 경향이 현대소설에서는 동물 속에서 인간을 관조하고 인간 속에 동물을 반영시키는 일종의 동물성과 인간성을 이중복사적으로 투시하는 표현법을 원용하는 방향으로 발상이 전환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물의 문학적 발상에서 기인된 작품의 진수는 아무래도 우화소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물의 문학적 발상에 바탕하여 상징적 발언을 통한 비의(秘義)를 간직하고 있는 현대판 동물우화소설은 드물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참신한 틀을 갖추고 동물우화소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의 비극은 스스로 조작된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에서 해방될 때 완전한 자유, 완전한 해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주제로 하여 동물의 의인화 수법을 빌어 표현한 작품이 김성한의 <개구리>이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향유할 줄 모르고 스스로 멍에를 쓰고자 자청하는 인간의 악행, 권능을 업고 대중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사악(邪惡)이 자행(恣行)되는 인간세상을 우화적 수법으로 풍자하고 있는 현대판 동물우화소설이다.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제우스를 가상(假想)하여 놓고 통치자가 되고 싶은 얼룩개구리와 자유 그대로의 삶이 좋다고 하는 초록개구리와의 대립 갈등으로 사건을 진행시켜 결국은 제우스의 나무람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아주 그럴듯한 동물의 세계이면서 숨김없는 인간세계의 양태(樣態)이기도 하다.
경직된 의식은 노예근성이나 조장하고 존재를 파멸의 구렁이로 빠뜨리게 하는 것이니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기존의 의식을 부숴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갖는 일일 것이다. 개구리가 쓰여졌던 시대는 전쟁의 폐허를 복원하고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야 할 시기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혼란의 와중에서 민의를 조작한 권력이 횡행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한 독재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6.25라는 처참한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착종된 현실에서 김성한은 풍자와 냉소적인 태도로 몰의식(沒意識)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김성한은 극한 상황에서 좌절하는 인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인간을 그리려 하였다. 소극적이며 순응하는 인간상을 배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형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현실문제를 고발함에 있어서 동물우화의 수법을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레고리와 풍자, 아이러니를 지향한 김성한의 작품세계의 폭을 한층 넓혀준 결과가 되기도 한다.
당초에 <제우스의 자살>이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던 이 작품을 <개구리>라는 동물(動物) 제명(題名)으로 개제(改題)한 의도를 짚어볼지라도 김성한은 동물우화 형식의 소설에 매료되었던 듯 싶다.
약삭빠르고 간교하면서 권세에 눈이 먼 얼룩개구리와 정의감이 강하고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초록개구리를 내세워 문명을 자처하는 인간세계를 풍자한 <개구리>는 영달을 꿈꾸는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가 오히려 인간세계를 황폐화시키고 불행을 자초할 것이라는 점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교훈적인 의미를 비유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우화소설의 본질이니 소설미학에의 충실함보다도 문학의 도덕적 효용성이 한층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뛰어난 시사감각(時事感覺)을 가지고 사회정의를 고발하려 들었던 김성한이 동물우화의 형식을 빌어 쓰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획기적인 문학적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벼룩, 빈대, 파리를 의인화하여 강자의 허세와 오만을 폭로하고 있는 <衆生>은 민주시대에 부조리하게 자생한 권력자의 무상을 풍자한 또 하나의 동물우화소설이다.
이[蝨]와 벼룩과 빈대와 파리와 메뚜기를 등장시켜 서로 어르렁거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제가 잘났다고 뽐내고 그러다가 결국 모두 잡혀 죽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을 이와 빈대, 벼룩의 수준으로 떨어뜨려 놓고 그들이 벌이는 작태(作態)를 통해 인간과 인간사를 풍자하고 있다.
작가는 서두의 프롤로그에서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오직 좁은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무자각의 심연 속에서 충동에 휩쓸려 돌고 있었다."고 운(韻)을 떼었다. 바쁜 삶의 와중에서 무자각한 현실의 혼돈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의 한국 풍토에 들이닥친 미국의 풍조야말로 벼룩이나 빈대에게 있어 물약 이상으로 한국사회에 있어서는 강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약삭빠른 벼룩같은 인간일지라도 그 세력 앞에서는 맥을 못추게 되어 있다. 그런 풍조를 기화로 미국풍조의 세력을 업고 허세를 부리는 오만한 인간상을 벼룩과 빈대를 내세워 풍자하고 있다.
김좌수의 손자놈이 내갈긴 소변의 강은 약삭빠른 벼룩과 진중한 빈대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빈대는 벼룩이 살아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덕이라면서 복종을 강요하는가 하면 안하무인격이 된 빈대는 파리를 건방지다고 하고 메뚜기를 부려먹지만 결국 여론의 입방아에 얹혀 패가망신하고 만다. 벼룩과 빈대의 자리바꿈에 결정적 계기가 된 소변의 강은 어쩌면 전쟁의 소용돌이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자리바꿈을 한 권력자는 억압을 주었던 자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그러한 오만은 화를 자초한다.
이나 빈대를 몰살하는 파리약처럼 인간을 멸종시킬 수 있는 원자탄으로 대변되는 인간문명에의 비판, 빈대와 벼룩의 자리바꿈으로 빗대어진 권력다툼, 허세와 오만이 활개치던 1950년대 중반 한국의 사회사를 <衆生>은 우화적인 수법으로 구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정종명의 <審判>은 또하나의 현대판 동물우화소설의 좋은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작품에 대해서 기대를 걸어봄직한 것은 이 작품이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종명은 <술래잡기>에서 '뱀껍질과 매미날개의 이야기', '대붕(大鵬)의 이야기', '까치와 매미와 범아재비 이야기' 등 장자(莊子)의 우언(寓言)을 끌어들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장자의 우언이 동물을 끌어들여 그것들을 인간과 같은 양태의 경우에 비교해서 거기에 무엇인가의 인간세게의 도리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의성(寓意性)을 바탕으로 한 정종명의 작가적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장자가 어느날 조릉이라는 밤나무 숲에서 놀다가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화살을 끼우고 있었는데 한 마리 매미가 기분 좋게 나무그늘에 앉아 자신도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고 있지 않은가. 그런 그 곁에는 까치가 기회를 타서 사마귀를 잡으려고 눈독을 들이느라고 장자에게 잡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이 이야기의 우의성(寓意性)은 정종명 소설들의 바탕이 되는 현실인식과 상통한다. 매미나 사마귀나 까치가 무모한 욕망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듯이 인간사회도 어리석은 자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매미나 사마귀나 까치의 어리석음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審判>은 새매라는 날짐승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삼인칭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추리라는 새매가 의식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적응과 소외의 문제에 대하여 동물을 통하여 상징적 발언을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작품 속에 극단적 양극화 및 흑백양분법이 지배하는 시대에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개인이 처할지 모르는 인간의 비운을 비의(秘義)로 간직하고 있다.
새매족에 속한 난추리는 알에서 부화된지 보름만에 까치독사에게 잡아먹힐 뻔한 위기에 부닥쳤다가 어떤 소년에게 구조되어 형제들과 함께 소년의 집으로 옮겨져서 길러지게 된다. 소년이 구해다 주는 먹이를 받아 먹고 편안하게 자라게 된 난추리는 어느날 소년이 잡아다 준 산 개구리를 보고 자신도 모르는 투지와 살의(殺意)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먹이를 향해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사냥 솜씨를 발휘한 것을 계기로 주인집 병아리를 잡아채다가 주인에게 들켜 소년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로부터 쫓아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에 소년은 난추리 형제를 산에다 내버리는 대신 발목에다가 가느다란 노끈을 매어 감나무 가지에다 올려 놓았는데 난추리의 다른 형제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혼자 남은 난추리만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난추리는 고독감과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해방감을 더 이상 즐길 형편이 못되었다. 아직도 제힘으로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사냥에 능통하지 못한 난추리는 자연히 소년을 찾아가서 먹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난추리가 자유의 몸이 된 직후의 공포와 고통을 이기고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찾아다니는 의지를 키워가던 그때에 동족의 리더인 이더귀를 만나게 된다. 이더귀는 난추리가 소년의 먹이를 얻어먹는 짓이야말로 새매족의 권위와 명예를 더럽힌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규탄하면서 "산이면 산, 마을이면 마을,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몰아 세운다. 이더귀로부터 이중인격자라는 낙인이 찍힌 난추리는 "누가 누구를 간섭한다는 것은 우리 동족의 습성에 어긋나는 짓이다.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다. 현실을 무시한 쓸데없는 오만과 편견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다."고 자기 변호를 하기도 했지만, 난추리는 공개재판에 회부되어 잣나무 숲을 영원히 떠나거나 아니면 마을로 내려가 병아리를 채어 오라는 무거운 판결을 받게 된다. 난추리는 소년의 집에 있는 중닭을 향해 공격을 하였고, 처음에는 반가와서 뛰어나왔던 소년은 마침내 분노의 눈길로 돌을 집어던지게 되었고 결국 난추리는 생명의 은인을 원수처럼 대하여야 하는 아이러니칼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숲과 마을에 대한 연줄을 동시에 끊은 난추리는 난생 처음 눈부신 비상(飛翔)을 경험한다는 것이 <審判>의 줄거리이다.
인간의 욕심과 동족인 새매의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소외의 아픔을 맛보고 있는 난추리의 실상이야말로 가히 이 단편의 주제의식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난추리가 현실주의적인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면 이더귀는 명분론자 혹은 이상주의자의 탁의(託意)라고 볼 수 있다. 동물우화는 위트와 유모어를 도구로 할뿐만 아니라 삶이나 인간의 진실에 대한 지혜 혹은 풍자를 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에 도덕적 메시지가 절실하게 와닿게 하면서도 아무런 역겨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우화가 한토막의 이야기로서 표면적 흥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면의 도덕적 의도까지도 비교적 간명하게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審判>에서의 마지막 단락은 이 우화의 메시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쪽이나 저 쪽,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새매의 비상(飛翔)은 추방자의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우의(寓意)하고 있다.
박양호의 <미친새>는 작가들의 소재 선택과 표현면에서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 당해 있었던 1970년대 후반에 유례가 드물게 나타난 동물우화소설이다.
<미친새>는 표면상으로는 닭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동물우화라는 우회적인 수법으로 표현한 성공적인 동물우화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되고 있는 동물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며 우화 속의 허구적 상황은 모순된 아이러니에 기초하여 비판의식을 조장한다. 특히 우화라는 서술방식은 인생과 사회의 단면을 동물에 가탁하여 압축과 비유를 통해 극적으로 제시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실문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할 수 없을 때 필봉(筆鋒)을 동물들의 이야기로 돌려 우의적 수법으로 사회현실이나 인간생활을 꼬집어 표현할 수 있는 동물우화소설의 강점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있을 수가 없다.
대체로 상징적 수법은 특히 소설의 경우 '빠져나가기'나 '굳히기'와 같은 동기를 갖는 것으로 설명된다. 참된 리얼리즘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정치적 분위기나 사회적 정황에 놓여 있는 작가들이라면 최소한의 리얼리즘이라도 붙들어 두려는 뜻에서 '빠져나가기'로서의 상징적 장치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박양호의 <미친새>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쓰여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미친새>에서는 '새'임을 주장하는 미친닭, 왕초닭, 사육사개, 살쾡이가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말 잘 듣고 평화를 사랑하고 복종과 충성심이 강하고 맹목적으로 속기 잘한 개떡같은 닭새끼 무리를 향해 사육사는 일정한 키로 자라 줄 것을 바랐고 또 닭들의 발톱을 시시때때로 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육사는 개들을 풀어놓아 24시간 닭들을 감시하기도 한다. 부리가 뭉툭하게 잘려서 들어온 미친 닭은 옆에 있는 닭들에게 우리도 분명히 '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동시에 날아야 한다는 신념을 주입시키다가 개에게 물려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미친닭, 왕초닭, 사육사, 개들, 그리고 공포심에 휩싸인채 일찌감치 자포자기의 습성에 젖어버리고 만 닭들은 1970년대 후반 한국 현실 속에 존재했던 인간상의 표상이다. 이들 존재 사이에서 빚어지는 명령, 지배, 굴종, 반항, 의식화의 현상을 동물우화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미친새>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동물을 인간과 긴밀한 동일성과 친화성이 있다고 보고 균등의 관계로 인지하려는 의식이 있는 한 동물의 문학적 발상과 상징은 지속되지 않을 수 없다.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경험적인 관찰과 인식 및 반응을 바탕으로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발상(發想)이 동물우화소설을 낳게 한 원동력이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사를 다룬 동물우화소설은 그것이 지닌 풍자, 해학, 아이러니적 매력으로 인해 현실비판, 풍자의 문학으로서 장구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 동물우화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갖가지 상황이 동물의 모습을 빌어 골계 및 풍자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보다 자유로운 현대소설에서의 동물의 문학적 발상은 동물관념이 상징적으로 수용되고 있는데 특징이 있다. 따라서 동물의 문학적 발상도 동물우화 단독으로 표현되기보다 암시나 상징의 방법으로 작품 속에 용해되어 나타나고 있다.
현대소설에서 전통적 동물우화소설의 골격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현실비판적 감각을 살린 동물우화소설 작품을 구성한 작가는 김성한(金聲翰), 정종명(鄭鐘明), 박양호(朴養浩)이다.
김성한의 <개구리>는 약삭빠르고 간교하면서 권세에 눈이 먼 얼룩개구리와 정의감이 강하고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초록개구리를 내세워 문명을 자처하는 인간세계를 풍자하였고, <衆生>은 이, 벼룩, 빈대, 파리를 의인화하여 민주시대에 부조리하게 자생한 권력자의 무상을 풍자함으로써 뛰어난 시사감각을 가지고 사회정의를 고발하였다.
정종명의 <審判>은 '새매'라는 날짐승을 주인공으로 하여 양극화 및 흑백양분법이 지배하는 시대에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개인이 처할지 모르는 인간의 비운을 암시하고 있다.
박양호의 <미친새>는 미친닭, 왕초닭, 사육사, 개들을 내세워 1970년대 후반 한국 현실 속에 존재했던 인간상의 표상을 동물우화적 수법으로 작품화하였다.
문학발상의 단초를 재어보는 일에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구분하여 논할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깊이를 심화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고전 속에 자리한 문학적 발상이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현대문학의 작품 속에 던져주고 있는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은 국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地平)이다.
동물을 의인화한 문학작품의 전통을 현대소설에 어떻게 투영(投影)시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나 비평가의 문학적 역량의 몫으로 남는다. (如岡 金在煥)
* 2000. 12. 새얼어문론집 제13집에 발표
** 전산입력상의 사정으로 각주(脚注)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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