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닭들의 집단무의식

如岡園 2012. 8. 22. 12:08

<달걀에서 부화돼 아직 꼬리에 달걀껍질이 달린 병아리가 자기 머리 위로 한 마리의 매가 날아가자 놀라 곧 자기 몸을 감추었지만 다른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갔을 때는 놀라지 않았다. 매의 모형을 만들어 철사줄을 이용하여 병아리 머리 위로 내밀자 병아리들은 또다시 질겁하여 도망쳤지만, 모형을 치우자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갈매기, 오리, 왜가리, 비둘기 등 다른 새들이 머리 위로 날을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예화(例話)는 신화 원형비평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한 캠블의 갓 부화된 병아리 생태 관찰에 대한 보고로서, 흔히 문학비평에서, 교육이론에서 자주 들어 본 이야기일 것이다.

이제 막 껍데기를 벗고 나온 병아리가 매를 보면 몸을 움츠리고 숨는 것은 닭이 대를 이어오며 매에 대한 공포가 무의식적으로 유전된 것으로 이러한 동물의 본능적 반응을 '생득적(生得的) 방어기제(防禦機制)'라 부른다.

 이 개념을 좀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한 것이 '집단무의식'으로,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은 이 집단무의식의 내용을 '원형(原型, Archetype)'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유전 암호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데, 논리 이전의 사고에 기원을 둔 이 원초적인 심상 유형과 상황은 동족 간에 놀랄 만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대학시절에 배운 캠블의 병아리 예화와 융의 집단무의식을 내가 떠올리게 된 것은 지난해부터 소일거리로 양계를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사슴과 나무꾼'이라는 부제를 달아 <樵鹿農園>이라고 그럴싸한 간판까지 내어다 건 농장의 양지바른 산언덕에 닭장을 지어 병아리 꼭 서른 마리를 사다가 넣었다.

 맹금류의 새도 있고 살쾡이도 드나드는 곳이라 닭을 기른다는 것이 좀 무모한 짓이긴 했지만 얼개가 잡혀가는 과일나무 밑에 닭들이 노니는 그림이 조금은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아닐까 싶어서였는데, 이것이 완전히 사람의 발목을 잡아두는 올가미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동물은 생득적으로 자기 방어 능력이 있다고 치더라도 가축은 사육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라, 선천적으로 게을러빠진 내 성벽을 매질하는 결과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도 한 것이다.

 병아리 강아지를 예뻐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게 역시 병아리는 예쁘고 사랑스럽고 앙증맞구나 하는 것도 잠깐, 어느새 병아리는 영계백숙 감으로 자란다. 닭장 안에만 가두어 기르지 않고 방목을 하려했던 것이니 농장 일대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제 집을 찾아 제대로 잠잘까 하는 우려는 동물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을 믿으면 되었지만 길들여지기 전에는 그것도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 마리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아래쪽 다른 사람의 닭들과 섞여 가지 않았나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웃 농장의 닭 한 마리가 따로 떨어져 우리 농장으로 들어와 사는 바람에 잃어버린 병아리 한 마리를 벌충하는 셈 치고 우리 농장 닭에 합류시키려고 사흘 동안을 몰아대어도 끝내 불발이었다. 섶이 많은 곳에 와서 알을 낳아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그녀석의 꿈을 알게 된 것은 가을이 저물어 갈 무렵 풀 섶에서 여남은 개의 썩은 달걀을 발견했을 때이다. 닭의 귀소본능을 몰랐던 어리석은 인간의 작태가 못내 부끄러웠을 따름이다.

 식용의 가축이다 보니 여름날 삼계탕이 제격이라 도축(屠畜)도 해야 했다.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고 그렇게도 따라다니는 녀석을 내 손으로 잡을 수는 없었다. 돈을 주어도 한 두 마리를 잡아 줄 인사는 없는 세상이다.

 암탉을 괴롭히는 수탉의 수를 줄여야 할 형편이라, 수탉의 폭거에 증오감을 축적하고 전의를 가다듬어 가족들까지 합세해야 성사되는 일이니 그것마저 할 짓이 아니다.

 성숙이 유독 빨랐던 암탉 한 마리가 있었다. 처음으로 알을 낳고 다른 암탉들이 연이어 알을 낳기 시작했는데도 수탉들이 이 암탉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이었다. 

 먹이를 따로 주고 특별히 보살폈더니 유독 잘 따라 이 암탉에게는 또 다른 연민의 정이 서리게 되었다. 다른 닭들에 섞이어 절뚝거리며 먹이를 찾고 생존력이 강인하여 동류끼리의 경쟁에도 뒤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보기가 안쓰러워 잡아 없애자는 주위의 청에도 불쌍한 생명이라 더 명을 이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그럭저럭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도 회복되고 알도 잘 낳았는데 또 그 수탉들의 횡포에 다리를 새로 다쳐 비실비실하더니 싸늘히 죽어 있었다. 복숭아나무 밑에 수목장을 하고 난 뒤의 허망감이란 것은 짐승에게서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마냥 닭장에 가두어 기르는 것이 아니라 방사(放飼)를 하다가 보니 거기에 길들여져 닭들이 닭장에만 갇혀 있으려 하지를 않는 것도 문제이다.

 굴밤나무들이 들어선 나무 그늘 밑에 닭장용 철망으로 비교적 넓게 지은 닭장이라 그 속에서 길러도 좋은 조건이었지만 이왕이면 더 야생으로 길러 보자는 바람에 매일 아침 닭장 문을 열어주고 저녁 때는 닭장 안으로 몰아넣어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다른 야생 동물의 침해가 따르는 일이라 먹이를 주는 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미처 문을 열어주지 못했던 어느 날 닭장을 탈출한 토종의 피가 더 섞인 암탉 한 마리가 살쾡이의 먹이감이 되고 만 일은 나를 더욱더 이 닭들의 노예로 옭아매는 결과가 되었다.

 닭들이 성장하여 날마다 어김없이 열 개 전후의 알을 낳기 시작하더니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알을 품으려 하였다. 닭들로 봐서는 종족 보존의 당연한 생존 절차를 밟아 가는 것이었지만, 엄동설한을 넘기면서까지 무슨 청승으로 닭을 기르랴 싶어 알을 품는 닭들의 알을 모조리 빼앗아 알을 까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였다. 도축을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행동이었지만 직업으로서의 양계가 아닌 아마추어의 한계였던 것이다.

 닭들의 머리수를 절반으로 줄여 겨울을 나고, 봄의 입김이 대지에 온기를 더해갈 무렵부터 이제는 부쩍 닭들이 알을 깼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다. 지난 가을, 알을 품으려는 닭을 방해했던 죄의식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개나리 꽃그늘에 노오란 병아리떼가 종종종 노닐어 까마득히 멀어져간 동심을 사로잡는 환영에 마음이 들뜬 3월 하순, 작년 그 알을 까고 싶어 안달하던 토종 암탉이 둥지를 틀어 알을 품는 바람에 욕심스레 열네 개의 알을 안겨 극진히 모셨다.

 저놈의 닭이 정말로 병아리를 깔 수 있을까 하고 안달이 났지만 알을 깨는 일이란 순전히 그 암탉의 생태적 본성의 영역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꼭 21일이 되는 4월 19일 한낮, '꼬곡꼬곡' 하고 꽁알거리는 어미닭의 소리를 신호로 그야말로 이제 막 껍데기를 벗고 어미닭의 품속을 빠져나오는 병아리 출생의 신비!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오는 그 장면을 현장에서 목도하는 환희를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한 마리 또 한 마리, 어미닭의 품은 마술사의 손길만 같았다.

 여기에,

 '갓 깨어난 병아리는 매를 보고 은신처를 찾아 내달린다. 동물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생득적 방어기제가 있다. 집단무의식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어쩌면 말장난 같기만 하다.

 그러지 않아도 닭들은 날짐승같이 너풀거리는 물건을 들고 접근을 해도 질겁을 하면서 달아난다. 자기네들끼리 따돌림이 있고 친소관계가 있으며, 승부욕이 있고 리더가 있다.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고, 특별히 대해 주면 기대치를 인식한다. 귀소본능에 확고하고, 전체적 대열에서의 이탈을 두려워한다.

 닭들의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집단생활을 통해 희로애락의 감정과 생로병사의 고통을 감득한다.

 인간을 필두로 한 모든 동물은 그들의 다양한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지 유전 암호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데, 논리 이전의 사고에 기원을 둔 이 원초적인 심상 유형과 상황은 동족 간에 놀랄만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였다.

 

 병아리 출생을 목격하면서 출생의 신비를 감득하고 닭을 기르면서 집단생활의 한 단면을 통찰한다.

 닭들의 집단무의식 세계를 관찰하면서 터무니없이 우리들 사람의 정치 감각에 흐르는 집단무의식이 무엇일까 하고 반문해 본다.   (수필동인지<길>13호. 2012. 6. 20)                

                                                                                     如岡  金 在 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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