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무속신앙(巫俗信仰)

如岡園 2012. 2. 17. 23:44

 한국의 민속에 관한 연구 가운데 비교적 관심이 깊은 것이 신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무속신앙(巫俗信仰)에 대한 연구가 중심을 이루어 왔다.

 이는 초기의 연구가인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기성종교를 이 땅에 뿌리박고자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며, 뒤따라 들어온 일제(日帝)는 한국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분석 이해하여 그들의 식민정책에 적용하려는 야심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민속학자 사회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얼을 살리자는 독립운동의 한 수단으로 신앙에 대한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이 방면의 연구가 비교적 진전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토착신앙, 즉 민간신앙은 무속신앙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돼 왔고 이를 그대로 샤머니즘이라는 말로도 써왔던 것이 사실이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샤머니즘이라는 말로는 토착신앙의 전부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한국에는 여러가지 원시종교의 유형이 있음이 밝혀졌다.

 외국인 선교사 등 초기 연구가들이 한국의 원시종교를 샤머니즘이라 부른 이후에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를 그대로 답습하여 샤머니즘이라는 말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협의의 샤머니즘이란 시베리아 중심의 엑스터시(ecstasy)와 인격전환(人格轉換), 즉 무병(巫病)을 거치는 것을 전제로 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념이 샤머니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으면서도 한국 원시종교를 통털어 샤머니즘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물론 엑스터시를 기본 요소로 삼고 있는 샤머니즘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한국 원시종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외에도 원시종교의 유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분포양상이 매우 다양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유형을 분류하면 크게 조직적인 신앙과 비조직적인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조직적인 신앙으로는 신흥하는 여러 종교단체를 들 수 있겠고, 비조직적인 신앙 유형으로는 다시 직업적인 유형(무당, 점장이 등)과 비직업적인 것으로나눌 수 있다.

 다시 비직업적인 신앙을 개별 가정신앙, 부락제와 같은 부락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다시 기능면에서, 무병(巫病), 접신(接神)을 기본 요소로 하는 것과 사제(司祭)적인 신앙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사제적인 신앙은 급속히 쇠멸해가는데 비해서 접신과 무병을 빙자하는 신앙형태는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 접신과 무병을 거치는 신앙 유형은 시베리아에 널리 분포된 샤머니즘으로 신령성(神靈性)과 신비성(神秘性)을 강조하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혹민(惑民)하는 요소가 짙다. 이러한 요소에 의하여 정숙형에 해당하는 개인신앙이 침해를 받고 있으며, 대다수의 국민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신흥종교(新興宗敎)의 대부분은 모두 이 요소를 중심으로 단체조직화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분포세력은 매우 빠른 것이다.

 신흥종교 종단(宗團)의 교주는 극히 소수의 예외자를 제하고는 거의 모두가 샤먼적 퍼스낼리티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신흥종교의 공통점이 되며 동시에 한국 민간 신앙의 핵(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샤먼적이란 바로 교주의 득도체험(得道體驗)으로, 무녀의 강신입무(降神入巫)와 똑같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요소가 민간신앙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보다 한국적인 신앙은 비샤먼적인 신앙으로 '당골'을 중심으로 한 직업적인 신앙과 부락신앙(별신굿 포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당골은 부계전승(父系傳承)에 의하여 사회조직 속에 파고들어 민간신앙의 사제자(司祭者)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부르는 무가는 전통예술의 명맥을 이어오는 것으로 신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공로자이기도 하다.

 당골들은 부부가 함께 굿을 하는데, 남편은 전체적인 지배자이며 굿에 있어서는 악공(樂工)으로서 반주를 하여 돕는 등 실권자이지만 실제 의례의 주역은 부인이 맡아서 한다. 부인은 친정에서도 무업(巫業)을 배우지만 당골판(당골의 영역)이나 의례를 시어머니로부터 배우고 물려받게 된다. 시집살이를 하며 시어머니로부터 긴 무가(巫歌)를 암송으로 배우고 굿의 절차를 눈익혀가며 당골업을 전승받게 되는 것이다.

 당골이란 직업은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받은 것이어서 어린애도 어른 당골에게 반말을 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은 극도의 천민의식을 지녀왔다. 그러면서도 직업전환의 길이 좀처럼 열리지 않을 뿐더러 사회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들은 그들대로 가능한 직업으로 기생이나 명창, 광대로 나가려는 노력이 끈기차서 마침내는 훌륭한 예술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따라서 명창들 중에는 이러한 가문 출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능한 직업전환이 되면 곧 당골 가문임을 숨기고 사회적으로 행세하려고 했다. 그들은 예술인으로 대접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신업이라는 그늘 밑에서 소리없이 시들어가고 있었음은 퍽 측은한 일이다. 그들의 굿은 정숙하고 신성하여 백성을 현혹하는 요소가 없는 예술이며 종교신앙이다. 판소리조에 얹어 부르는 긴 무가(巫歌)와 양중[巫夫]들이 치는 삼현육각이 한데 어울려 노는 그들을 바라보면 백성이 무엇을 즐기며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들이 하는 굿은 대개 세 가지인데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씨끔굿'(또는 오구굿)이고, 일년의 무사태평을 비는 '안택굿', 부락민의 안강과 풍년을 비는 '별신굿'이 있다. 이들 굿은 목적과 대상신이 좀 다른 것이며 굿의 절차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씨끔굿이란 특히 익사한 이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가라는 굿인데, 조상을 위한 조상굿이라고도 한다. 서울지방의 '쥐노기굿'이나 강원 경상지방의 '오구굿'에 해당한다.

 제청(祭廳)이라고 하여 차일을 치고 돗자리로 막아놓아 굿당을 만들고 병풍 앞 젯상에 제물을 차려놓는데, 사대조 조상님네들의 신위를 써붙이고 삼현육각(三絃六角)에 따라 의관을 정제한 남자 자손들이 고두 재배로 3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밤이 지새도록 굿을 하는데 동이 틀 무렵에야 끝낸다. 굿은 종교성과 예술성의 연속이며, 흔히 강신무(降神巫)들이 하는 것과 같은 도무(跳舞)나 공수[神託]가 없고 돈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내용은 죽은이의 혼을 찾아 원혼을 풀어준다는 고풀이가 있고, 원혼을 물로 깨끗이 씻겨서 좋은 곳으로 가라는 길닦음이 있다. 굿은 열두석[十二祭次]으로 되었다고 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전체는 연속적으로 진행되며 석은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다. 서울지방의 굿의 열두 거리가 독립적인데 비하여 당골들의 굿은 연속적이다.

 당골은 매우 천시당했지만, 양반들은 그들을 자주 초치하여 놀이를 마련했으므로 양반의 기호에 맞도록 무가를 다듬고 창도 가다듬었으니 점점 예술적인 것이 강조되었고 드디어는 판소리 같은 노래와 줄타기 광대가 속출하여 전통예술의 모태가 되어 왔다. 그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예술을 연마할 수 있고 동호인들이 같이 즐길 장소로 신청(神廳)을 지었다. 신청은 그들이 자기네 당골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곳이며, 동시에 공연장이고 후예를 가르치는 학교이기도 하였으니, 당골 출신이 이 신청을 거쳐 훌륭한 명창이 된 예는 아주 많다. 신청을 전통예술의 요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나, 이제 이 신청은 하나도 남지 않고 폐허가 되었거나 없어졌다. 

 그들이 창하는 무가 중에는 오구풀이, 제석풀이, 심청가 등의 긴 것이 있는데, 한국인의 영혼관을 반영하는 좋은 신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구풀이나 제석풀이는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심청가는 동해안 지역에 분포된 무가다. 효녀 심청의 아비 심봉사가 눈 뜨는 장면을 익살스럽게 노래와 춤으로 서사적으로 엮어가고 있다. 고대소설의 심청전이 이러한 무가를 기초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골과 비슷한 전승구조인 제주 무속의 '심방'도 역시 흥미로운 존재이다. 한국 민간신앙의 유형 가운데서 가장 풍부한 신화를 간직한 것이 심방이다.

 위의 유형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서울지방의 무속은 강신입무(降神入巫)들에 의하여 열두거리굿[十二祭次]을 형성하였으며, 궁중신앙(宮中信仰)에서 위치를 차지하는 등 확고한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당골이나 심방의 유형보다는 후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계통이거나 적어도 그러한 영향 아래에서 생겨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곳의 무당들은 국무(國巫)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등 상당히 무속으로 발전하였으나, 강신입무 계통의 혹민적(惑民的) 공수[神託]를 기본 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폐를 동반하므로 금제(禁制)를 받아 서울에서 성밖으로 쫓아내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지켜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서울과 개성 주위에는 무당이 들끓는 신당이 있었으니, 서울의 남산국사당(南山國師堂), 홍제동의 할미당, 사신서낭당[使臣城皇堂] 등 많은 신당이 있어 나라굿을 하는 등 굿은 그치지 않았다.

 남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던 국사당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자기네 신사(神社)를 짓는다고 우리네 신당을 옮기라고 하여 할 수 없이 지금의 자리인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금도 국사당에 가면 거의 언제나 굿을 볼 수 있다. 당 안에는 20여 장의 무신도(巫神圖)가 걸려 있는데 하나같이 민간신앙의 성격과 냄새를 풍기고 있다. 특히 이태조의 내외분과 민비의 화상이 걸려 있는 것은 퍽 인상적이다. 이조말 궁중 발기에 의하면 이 무신도는 궁에서 그려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 무신도가 궁에서 그려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가지만 확실한 연대나 작가는 알 수 없고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수법의 무신도는 사신서낭당과 할미당에도 전해오고 있다.

 서울지방의 열두거리굿은 처음 부정풀이로부터 시작하여 10~20여 개의 거리가 있는데, 굿의 규모와 지방에 따라 그의 절차는 다소 출입이 있다. 거리와 거리는 독립적으로 되어 있으며 각 거리마다 청배(請陪), 오신(娛神), 송신(送神)의 과정이 춤과 노래에 의해 특징되고 있는데, 무녀가 도무(跳舞)를 하며 강신하게 되면 신의 말인 공수[神託]를 내린다. 이때 무녀는 신의 위치가 되어 인간에게 화복(禍福)을 말해주고 노자돈을 달라고 한다. 신의 기분을 돋우기 위한 노자돈을 별비(別費)라고 하여 많이 바치게 된다. 호화찬란한 신복(神服)을 입고 춤과 노래를 하지만 가사보다는 곡조에 중심이 있고, 곡조보다는 신의 말인 공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근세에 올수록 긴 가사는 모두 빠지고 도무(跳舞)와 공수가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굿은 일정한 거리와 패턴이 있기 때문에 간략하지만 형식을 지키고 있다.

 이 열두거리 서울지방의 무속이 이미 고려말에 형성되어 있음은 이규보의 <노무편(老巫篇)>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노무편 시에 의하면 무신도(巫神圖)를 건 굿당에서 무당이 음주 도무하며 공수를 내리는 등 오늘날 서울지방의 무속과 별다른 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무당이 새소리처럼 지껄이고 느닷없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아낙네들이 굿구경하러 가는 장면을 선명하게 그린 대목이 있다.

 적어도 고려말에 형성되어 있던 열두거리 굿은 조선조를 통해 더욱 확고한 유형으로 자리잡혀갔던 것이니, 조선조에서는 별기은(別祈恩) 또는 별기도(別祈禱)라 하여 봄 가을로 개성의 덕물산(德勿山)이나 송악산에 가서 자주 정성을 드렸고, 그때 사용한 물목(物目)을 보면 상당한 비용을 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간에서도 덕물산과 감악산에 올라가 춘추로 굿을 하는 예가 많았으나, 6.25후에는 모두 올라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궁중이나 민간에서 행하는 굿의 절차는 동일하나 다만 굿의 규모가 달랐던 것이다. 대체로 잘 알려진 굿의 절차는 1)부정, 2)불사맞이, 3)초가망거리, 4)조상거리, 5)대감거리, 6)성주거리, 7)산마누라거리, 8)별상거리, 9)신장거리, 10)제석거리, 11)호구거리, 12)창부거리, 13)걸립, 14)구능, 15)영산, 16)뒷전으로 대감(大監, 터주神), 성조(成造, 家宅神), 산마누라(山神), 별상(別相, 天然痘神), 제석(帝釋, 産神 農神), 창부(唱夫, 廣大神)등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신들이며,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산신을 크게 받드는데 산신은 최영장군의 인격신이라 한다. 이곳의 무당들은 긴 무가보다는 공수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긴 무가가 별로 없고, 비교적 긴 것은 '바리공주(七公主)'와 '황제(黃帝)풀이' 정도다. 서울 굿과 황해도, 평안도 굿은 거의 같은 형태로 보이나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함경도 지방의 굿은 서울지방 굿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으며, 무가는 풍부한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다.

 전국적인 무속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 신화는 다음과 같다.

 

바리공주(칠공주, 오구풀이)

 주상전하의 세자가 나이 15세가 되어 길례(吉禮)를 치러야 할 때, 관상감과 점장이에게 택일하여 관상감 말대로 폐길년에 길례를 올렸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폐길년에 길례를 올리면 칠공주를 낳고, 대길년에 길례를 올리면 삼동궁(三東宮)을 낳을 괘라고 하였다. 그런데 점장이 말을 듣지 않고 관상감 말대로 폐길년에 길례를 올린 죄로 세자궁은 계속해서 딸만 낳았는데, 일곱번째 딸을 낳았을 때는 왕이 화가 나서 그 아기를 후원(後苑)에 버렸다. 어느날 왕(세자)과 중전이 후원을 돌다가 아기를 발견하고 다시 궤짝에 담아 해중(海中)에 던졌다. 버린 아기라 하여 '바리공주'라는 이름이 주어진 이 아기를 석가세존이 안내하여 산간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데려다가 기르게 되었다.

 한편 양전마마가 한날 한시에 병이 나서 죽게 되었는데, 천하궁에 점복을 하니 일곱 번째 바리공주를 찾아 데려오란다. 바리공주를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아 데려오는데, 돌아온 바리공주는 누구도 갈 수 없는 지옥에 가서 종살이를 하면서 마침내 악려수를 떠다 양전마마를 살려낸다. 바리공주는 무장선관과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아 데려왔다. 무장선관은 장승이 되고 바리공주는 무당이 되고 일곱 아들은 칠성(七星)이 되었다.

 이 무가는 아들을 못낳고 버려졌던 바리공주가 일곱 아들을 낳고 무조(巫祖)가 되어서 망자(亡者)의 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이야기인데, 망자를 위한 굿에만 불려진다.

 

제석삼신풀이(당금아기, 삼태자풀이)

 도를 닦는 중이 당금뜰 당금아기집으로 시주를 거두러 내려갔다. 중은 당금아기가 주는 좁쌀 시주를 일부러 쏟아뜨려 주어담게 하는 등 수작을 건네어 마침내 당금아기를 데리고 절로 들어간다. 절간으로 들어간 두 남녀는 같은 방에서 자게 되는데, 중은 아랫목에서, 당금아기는 웃목에서 따로 자지만 신령(神靈)으로 잉태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중은 목탁으로 오줌통을 만들고 장삼을 벗어 어린애 옷을 만들어 입혀 길러낸다. 이 세 아들이 제석(帝釋) 삼신(三神)이 되었다는 줄거리다.

 이 무가는 제석신의 발생신화로서 불교적인 색채가 아주 짙은 것으로, 본래 무속신화이던 것이 중의 파계설화를 차용한 것 같다.  

                                                                     (梁在淵, 任東權, 張德順, 崔吉城 共編 韓國風俗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