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거룩하다 100년의 전통
"원학 심진 화림 삼동 화려한 산수 / 삼천리 금수 강산 이 곳이로다 / 이 강산 정기를 타고 받아서 / 배달민 정신을 이어 받았네 / 안의공립국민학교 배우는 우리 / 사람 길 바로 닦아 민족 국가 빛내세"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면서 오매에도 잊지 못할 노래가,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의 이 교가이다.
칠십을 넘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고 많은 동창생, 직장동료가 있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만큼 영원하고 다정한 친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고향, 어린 시절, 친구, 향수... 이런 어휘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때묻지 않은 마음 속에 각인된 순수한 정념 때문이리라.
고향이여, 아름다운 땅이여,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을 처음으로 본 그 고장은 우리들 눈앞에 떠올라 항상 아름답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
그러한 고향에 터 잡고 있는 초등학교, 배움으로 눈을 떠 사람이 되기 시작한 첫 배움의 터전이 된 안의초등학교야 말로 어머니의 품안과도 같은 보금자리이다.
1972년, <安義國民學校六十年誌>를 받아보고 대단히 역사가 오랜 학교라고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이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1910년 우리 고장 선각자들께서 신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설립한 의명의숙(義明義塾)이 1912년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의해 해산되고 안의공립보통학교로 출발한 지 어언 100년, 공립초등학교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지금이야 전교생을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해방 직후 응원가에, '천 팔백 모인 우리의 학원 안의공립국민학교 육상경기부'라 하였던 것을 보면 재학생의 규모가 대단했던 것이다.
살아계셨으면 103세가 되는 선친이 13회 졸업생이고, 29회로 졸업한 큰누님을 비롯하여 7남매가 모두 동창생이 되는 그런 학교는 세상에서 그리 흔치 않다. 태반의 사람들이 대도시의 전셋방으로 떠돌아 졸업 때까지 몇 개의 학교를 전전긍긍하며 졸업을 하는 오늘의 세월에 비하면 그것만으로도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상의 시기도 많았다. 37회가 되는 필자의 6년 동안의 시기만 두고 볼지라도 일제로부터의 조국 해방이 있었고, 6.25전쟁의 상흔도 있었다.
1945년 식민지 조선의 안의공립국민학교 1학년에 내가 입학을 한 지 5개월 만에 조국이 해방되었다.
늘어나는 신입생을 미처 다 수용 못하여 광풍루 누각 기둥 사이를 칸막이한 임시교실, '천대근(千大根)!' 하고 출석을 불렀는데, '하이'! 하고 대답을 하였으니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천대근은 '지하라 다이꽁(千原大根)'이었고, '지하라 다이꽁!', '하이!'에 익숙해 있었으니 미처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글 맞춤법이 서툰 교사가 있는 것은 흉이 아니었고, 지푸라기가 섞인 재생 종이와 양철 조각을 말아 흑연 심을 박은 '건국연필'이 필기도구의 전부였다.
좌우 세력이 갈등을 빚으면서 3.1절 경축행사가 둘로 쪼개어져 어수선했던 것도 잠간, 운동장은 빨갱이를 잡아낼 병력을 훈련시키는 연병장이 된다.
더 큰 상처는 6.25전쟁이다.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조회시간,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 중에서 상급반이 되는 6학년생 우리들은 전쟁의 소식을 접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7월 28일 몇몇 교직원과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가 남상면 둔마부락 뒷산에서 공비를 만나 흉탄에 유명을 달리 하신 이윤택 교장선생님의 일은 학교 100년사에 드리워진 비극이기도 하다.
우리 고장이 인민군에 침탈되는 날 최대의 피해자는 우리들 모교였지. 포탄에 허물어진 현관 라운지, 유혈이 낭자한 복도 마루의 바닥, 총탄의 세례를 받고 만신창이가 된 교실, 대밭산에서 후퇴해 밀리면서 우리 학교 일원에서 장렬히 전사한 수십 구의 미군 병사의 죽음은 전쟁의 잔인성을 우리들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수복이 되고 학교는 문이 열렸지만 미군이 주둔했다가 철수한 교내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빈 깡통, 폐건전지, 커피 팩, 쓰다가 남은 츄브치약, C레이션 박스 같은 온갖 쓰레기마저 그 시절엔 생소한 것들이었다. 미처 수거해 가지 못한 폭발물은 호기심 많은 어린 우리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 시기 우리 모두의 기억에 생생한 전쟁 잔존물은 운동장 복판에 버려진 6대의 미군 탱크일 것이다. 고장이 난 이 강철덩어리는 손쉽게 들어낼 수도 없어 몇 년 동안이나 운동장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학교 생활에 골치 아픈 방해물이 되었던 대신 우리들의 장난감이자 놀이기구이기도 하여 잊을 수가 없다.
우러러 덕유, 지리 높은 봉우리가 하늘에 닿은 산곡 촌읍 안의! 그 중에서도 대밭산 아래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은 모교 안의초등학교는 안의혼(安義魂)의 심장이다.
함양군의 안의이면서도 굳이 안의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고집 센 사람들.
신라 백제의 경계선에서 변방의 첨병일 수밖에 없었고, 황석산 피바위의 전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
소백산 줄기를 경계로 한 숙명적인 갈림길에서 우리는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살아왔다.
흘러간 세월의 영예를 굳이 들추어 자랑한들 뭣하리? 허나, 진실 된 역사는 과거를 뒤돌아보는 일이면서도 앞을 내다보게도 하는 예언이며 명확해진 경험이다. 사물의 처음을 찾는 것으로서 사람은 그 다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형 무형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들이 그 진실을 알고 보전을 함으로써 후세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안의의 옛 영역은 현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하여 동북쪽 육십리 상거의 북상, 북하, 고현, 동리, 남리 등 원학동 유역의 거창군 일대와, 서쪽 사십 오리 상거의 서상, 서하 등 화림동의 발원지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용추계곡의 심진동을 포함하여 이것이 이른바 안의 삼동(安義三洞)이다.
안의의 옛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신라 마리현(馬利縣)이었는데 이안현이라 고쳐 천령군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가 고려 공양왕 때 감음현(感陰縣, 現 위천)에 이속시켰다. 감음현은 본래 신라의 남내현(南內縣)이다. 경덕왕이 여선(餘善)이라 고쳐 거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가 고려 초에 다시 감음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합주(陜州, 現 합천)에 이속시키기도 하였다. 의종 12년에 현인이 무고를 하였다는 이유로 현을 강등시켜 부곡(部曲)으로 만들었다가 공양왕 때 다시 감무(監務)를 두고 이안현을 내속(來屬)시켰다. 조선 태종조에 와서 관아를 이안(利安, 現 안의면 소재지)으로 옮기고 안음(安陰)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영조 4년(1728)의 무신란과 관련하여 그 이듬해인 기유년에 현이 혁파(革罷)되어 함양과 거창으로 분속(分屬)되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복현(復縣)되었고 영조 43년(1767) 안의(安義)로 이름을 고쳤으며 별호는 화림(花林)이다.
그후 고종32년(1895) 안의군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개국 533년 갑자년(1914)에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안의군이 해체되어 12개 면 중 5개 면은 함양군에, 나머지 7개 면은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안의가 옛날 군현(郡縣)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건물은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안의초등학교 창립 초기 임시 교사로도 활용되었던 곳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후손들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을 대접하고 묵게 하던 객사(客舍)만 두고 볼지라도 소실 후 그 집터마저 보존을 하고 있지 못하다. 객사의 북쪽에 있었다는 현청사(縣廳舍)인 아사(衙舍), 내외(內外) 동헌(東軒)인 일시헌(一視軒), 취균헌(翠筠軒) 같은 관청 건물은 그것이 있었던 자리에 표석이라도 설치하여 알려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황암사와는 별도로, 황석산성에서 순사(殉死)한 곽후를 안의현 현사에서 제사한 연암의 기록(安義縣縣司祀郭侯記)에 있는 사당은 필자가 안의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만 하더라도 객사 뒤편에 퇴락한 모습으로 있었는데 그것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수년전, 진단학회, 한국한문학연구회 등 관련학회에서 주관하여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를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우리 지역 일원에 산재한 문화적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여 교육적 자료로 활용하고 선양함으로써 자긍심을 살려간다는 것은 향토와 모교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은 훈련을 받지 않은 사냥개와도 같다고 하였다. 사람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제도적 교육기관이 필요한 것은,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교제의 장으로서의 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 국가의 기초는 소년을 교육하는 데 있으므로 모든 교육기관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소년의 시기는 청년이나 장년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본심과 진실성과 순진함이 있는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 교류한 인간관계는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성격의 형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초등교육의 중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년의 세월 동안 안의초등학교가 배출한 기라성 같은 인재가 가정과 사회,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12년 4월 4일 안의공립보통학교의 이름으로 광풍루에서 개교를 한 이래, 원객사(元客舍)인 화림관을 개수,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가 1938년 현재의 위치에 신교사를 지어 정착한 모교가 오늘까지 배출한 인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100년의 역사, 그리고 장구한 세월에 쌓아온 전통을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면(連綿)하는 전통은 가다가는 모호한 점도 있고, 보다 넓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무조건적인 계승보다 역사적 의의를 부과하여 비상한 노력으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될 가치인 것이다. 훌륭한 전통을 자랑으로 삼되, 앞선 세대가 남긴 성과를 맹목적으로 혹은 고식적(姑息的)으로 고수하여 수용할 것이 아니라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꿈에도 잊지 못할 내 고향 안의, 대밭산 아래 정다운 모교를 떠올리면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그러한 심상의 원천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애교심이 아니겠는가.
(안의초등학교 100년사, 100년의 추억 - 37회 如岡 金在煥의 글. 201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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