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 모사(茅沙)에 술을 부어 강신을 하는 일이 별스럽다 싶어 전적을 상고하였던니, 띠를 엮어 술을 거르면 생초(生초)나 견직물의 견대(肩帶)에 넣어 거른 것보다도 술이 더 맑기 때문에 포모(包茅)를 쓴다는 것이었다.
포모는 곧, 깨끗하게 씻은 모래를 담은 제기(祭器)에 띠를 묶어 꽂은 것으로 술을 거르는 행위이니, 조상의 제사에 탁한 술을 올리기 보다는 맑은 술을 드리려는 정성의 표현인데, 요즈음 술은 모두 맑게 거른 술이니 부질없는 짓이면서도 그런 행위가 계속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아 의식(儀式)이란 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문화의 한 현상인가를 짐작케 한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이나 생활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과 생활양식을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돌발적인 장식물이 아니라 대중 속에 침투하여 사회적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이어져 온 내적 정신 활동의 소산(所産)이다.
제사를 모시는 행위도 문화의 한 단면이고 보면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 단번에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니 그 문화권을 벗어나지 않는 한, 관례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대봉제사(四代奉祭祀)에 조율이시(棗栗梨枾)를 진설(陳設)하는 제사의 범위나 제사상(祭祀床)의 진설(陳設) 문제는 그런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의 제사를 모시는 당위성이 내재한 현실 인식이었을 것이다.
전근대의 대가족 시대에는 한 울타리 안에서 4대까지는 같이 생존해 있었을 것이니, 적어도 생시에 얼굴을 맞대었던 조상까지는 기제사(忌祭祀)를 모셔야 했을 것이고, 자손의 번성을 기리기 위해서는 실과(實果)의 으뜸이 되는 대추[棗], 밤[栗], 배[梨], 감[枾] 정도는 제사상에 올려야 했을 것이니, 이 어찌 미쁜 생각이 도사린 제사 문화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하도 바쁘게 급변하다 보니 사정이 달라져 가고 있어 꼭 그러한 문화적 행위를 현실에서 그대로 수용 이행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바쁜 세상에, 범위를 축소하고 절차를 간소화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되겠지만, 한 문화가 새로운 질서로 자리를 잡아가는 데에는 대중의 심경으로부터의 동의와 사회적 인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시기, 정부에서 가정의례 준칙을 내놓으면서까지 간소한 제례(祭禮)와 의식(儀式)을 치르도록 권장한 일도 있었지만 신통한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문제는 정책적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질서의 본으로 삼아 사람의 도리를 지켜가야 할 전통사회에서, 장남이란 입장은 조선(祖先)의 제사를 모시는 일의 중심에 서 있어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쓸데없는 일이라 하시면서도 전례(前例)는 어김없이 그대로 따라하시던 선친(先親)의 관례(慣例)를 따라 제사를 모셔온 세월이, 나도 이제 대(代)를 물려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고조(高祖)까지 사대에 걸친 열 분의 기제사를 하루에 몰아 제사모시는 날을 정하여 이행하고, 벌초(伐草)와 성묘(省墓)는 기력(氣力)이 미치는 시점까지 시간을 낼 수 있는 동기(同氣)와 자녀(子女)를 동반하여 손수 행하며, 입향조(入鄕祖)까지의 시사(時祀)는 종중(宗中)의 뜻에 따르는 방향으로 작정을 하고 있지만 이것마저 쓸데없는 일인지 모른다.
요즘 세상에 이르러 대(代)가 바뀌면 이런 것은 모두 그 이행여부가 미지수다. 그런데 쓸데없는 일이라고 단정을 내리고서도 그런 일에 이끌려 드는 것은 아무래도 죽음과 영혼에 관련된 일이여서가 아닐까.
인생의 만년을 외국에 가서 살면서 조상의 산소와 제사 문제, 사후 자신들의 장례문제까지를 걱정하는 친구가 있었다.
낯선 타국 땅에 묻히기는 싫다는 것이었고, 생살이 불에 타서 오그려드는 화장은 죽어도 싫단다. 조국(祖國)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수가 없고, 먼저 타계한 육친의 화장 장면이 연상되는 장례과정이 싫었던 것이다. 육탈(肉脫)된 유골이나마 모국 고향땅 선산(先山)에 묻히기를 유언처럼 희망하는 심경을 이해할 여지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고국 땅 풍습과 문화, 제례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재일 동포나 중국 연변 조선족 동포의 심상(心狀)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시각의 차이로 전통의 문화를 깡그리 짓밟아버리거나 생뚱맞은 방법으로 다른 문화가 갈마드는 일이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절대불변(絶對不變)의 문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전통의 문화를 방기(放棄)한 채 주체(主體)가 없는 국적불명(國籍不明)의 문화를 여과 없이 수용하여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망발도 문제라면 문제다.
근대화 과정에서 외래문화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면서 미신(迷信)이라는 이름으로 배척당한 전통적 민간 신앙(民間信仰)의 존재는 어쩌면 민족문화의 자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앙적 차원에서의 외래 종교의 수용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도 기존의 가치 체계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고만 했던 침략적 발상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문화에 도전을 하고 외래문화에 응전하는 양극(兩極)의 상충(相沖)은 순교자라는 영웅을 낳을 수는 있었지만 궁극적인 갈등의 골을 단기간에 메우지는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기존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신념은 뿌리가 깊고, 상호(相互) 호혜(互惠)의 길이 트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충효를 인륜의 큰 덕목으로 삼고 조상섬기기를 하늘같이 여기는 백성에게 제사의 길을 막아버리는 선교(宣敎)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산신각(山神閣)을 따로 지어 호랑이도 섬기고, 남의 조상의 제사까지를 지내주는 신앙세계의 장(場)으로 발길이 수이 떨어지는 백성이 다수로 살고 있는 나라다.
전통문화의 보존과 외래문화의 수용, 나아가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는 상호 대립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을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하여 변별(辨別)로써 가치를 높여가야 할 일이 아닌가.
변해가는 시대의 조류를 개탄하는 보수(保守)가 되어서도 안 되고, 낡은 것은 모두 가치 없는 것이라고 속단하여 알맹이 없는 새로운 것을 맹목적으로 만들어 내는 혁신(革新)이라면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결혼 의식에 생각이 미치고 보면, 오늘의 우리나라 통상적인 결혼식은 과연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 이런 결혼식을 했는가 하고 어리둥절해진다.
순절(殉節)의 새가 되는 기러기로 맹세하고(전안례), 표주박을 맞대어 술잔을 나누는(합근례) 전통혼례의 진수(眞髓)를 방기하고서, 영혼이 없는 국적불명의 신식 결혼식에 만세삼창까지를 곁들이는 것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어떤 지방 명문의 성당에서 덕망 높은 신부의 집전 아래 치러진 결혼식에 임한 적이 있었다.
종교적 신심(信心)이 깊지를 못하여 교회나 성당의 행사라면 거부 반응부터 일으키기가 십상인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카톨릭의 계율에 따른 그 엄숙함 진지함 그것이었다. 그런 야무진 절차, 철석 같은 맹서(盟誓)로 다진 결혼식의 부부가 어찌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결혼식의 귀감(龜鑑)은 높은 문화로 자라, 저절로 전파되는 것이 순리일지니 기이(奇異)한 새로운 것을 찾는 어리석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간관계의 질서를 말하는 예(禮),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 그 중에서도 엄중히 고수(固守)를 하였던 제사 문화가 흔들리고 있다.
문화의 흐름도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니 그 변화와 이질 문화의 수용을 탓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잘못된 인식이나 무지, 혹은 자부심의 상실에서 비롯된 전통문화의 파괴 내지 맹목적인 이질 문화에로의 교체 또는 모방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013. 8. 15. 길 14호. 여강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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