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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駙馬)/연목구어(緣木求魚)/일자천금(一字千金)

如岡園 2017. 3. 1. 18:25

          # 부마(駙馬)

  부마(駙馬)란 본래 부마(副馬) 즉 주마(主馬)에게 딸린 말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천자(天子)의 사위라는 뜻으로 바뀐 데에는 까닭이 있다. 한(漢)나라 무제 때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벼슬을 두어 부마를 관장하게 했는데 공주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 벼슬을 맡게 하였던 까닭이다.

 옛날 농서에 신도도(辛道度)라는 사내가 있었다. 지방으로 유학을 갔다가 돈이 궁하여 굶주리며 옹주의 서쪽 50리까지 왔을 때 웬 커다란 저택이 있고 그 문전에 하녀인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신 도도는 사정 얘기를 하고 밥을 청했더니 하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서는 안주인의 방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말하였다.

 "나는 진(秦)나라 민왕(閔王)의 공주였는데 조(曹)나라로 출가했다가 남편을 여의고 그로부터 22년 동안을 홀로 지낸다오. 손님께서 모처럼 와주셨으니 제발 부부가 돼주어요."

 신 도도는 그렇듯 고귀한 여인이라서 사양했으나 간청에 못이겨 인연을 맺기를 사흘 낮 사흘 밤, 여인은 처량하게 신 도도에게 말하였다.

 "당신하고 더 지내고 싶지만 사흘 밤밖에 안된다오. 더 지내다가는 화를 입을테니 헤어져야겠는데 헤어지고 나면 나의 정성을 드릴 수 없겠구려. 다만 정표로서 이걸 받아줘요."

 여인은 신 도도에게 금베개를 주고 하녀더러 대문까지 배웅케 하였다. 그런데 대문을 나와서 돌아보니 저택은 온데 간데 없고 잡초가 우거진 벌판에 무덤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나 금베개만은 어김없이 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먹었다.

 훗날 진나라의 황비(皇妃)가 장터에서 그 베개를 발견하고 조사해 보니 신 도도라는 사내가 나타났다. 황비는 이상히 여겨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봤더니 장례때 넣어준 물건들은 다 있건만 오직 금베개가 없었다. 딸의 몸을 살펴보니 정사를 치른 흔적이 완연했다. 황비는 비로소 신 도도의 말을 곧이 여기고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사위라고 '부마도위(駙馬都尉)' 벼슬을 주어 금마차를 베풀어서 본국으로 보내 주었다는 데서 부마(駙馬)라는 말이 생겨났다.


          #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것이니 어떤 일이거나 그 길에 따르지 않으면 헛수고에 그친다는 말이다.

 나이 50이 지난 맹자가 양(梁)나라를 떠나 제(齊) 나라로 갔다. 동방의 나라 제는 서쪽의 진나라 남쪽의 초나라와 함께 강대국이었다. 선왕(宣王)은 멋장이 임금이었는데 맹자는 그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러나 시대는 맹자가 주장하는 인의(仁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대가 아니라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외교상의 책모(策謨)의 시대였다. 선왕은 중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이었기에, 

 "나랏님의 대망을 듣잡고자 합니다." 하고 맹자는 설득하려고 애썼다.

 "나랏님의 소망은 영토를 확장하여 진 나라 초 나라와 같은 대국을 굴복 시키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들을 복종케 하시려는 거겠죠. 하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무력만으로 그것을 이루시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시려는 거나 같습니다."

 "그다지도 무리한 노릇이란 말이오?"

 "아니 그보다도 더욱 무리한 노릇이올시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려고 하신다면 다만 물고기를 얻지 못하시는 데에 그치겠습니다만, 무력만 가지고 영토 확장의 대망을 이루시려 하신다면 백성들이 곯고 나라가 망가지는 재난이 왔으면 왔지 결코 좋은 결과가 오지는 않으니까요."

  

          # 일자천금(一字千金)

 글자 하나를 첨삭(添削)하는 데에 대해서 천금의 상을 베풀겠노라 한 고사.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은 식객(食客)을 유치하기에 바빴다. 식객이란 일예 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난 자들인 바, 이를테면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식객이 수천명이요,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식객은 3천여명,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은 수천명,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은 3천명- 이렇게 저마다 식객의 수효를 자랑하였다.

 그 무렵 여러 군주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으니 일개 장사치로서 몸을 일으켜 이제는 강대국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어 어린 왕정(王政, 훗날 始皇帝)을 조종하며 위세를 떨치던 여불위(呂不韋)이다. 

 그는 사재를 기울여서 식객을 모으니 어느덧 삼천여명에 달하였다.

 마침 각국에서 저서를 펴 내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여불위도 질세라 여러 식객으로 하여금 20여만 마디의 대책을 펴니 그것이 곧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천지 만물, 고금(古今)에 관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느니라. 이렇게 큰 사업을 해낼 사람은 이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여불위는 그 방대한 책을 수도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다 늘어 놓고 그 위에다 천금을 매달아 크게 방(榜)을 내세웠다.

 "이 책에서 한 자(字)라도 더하거나 깎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천금(千金)을 주겠노라.

 시체 문자로 웃기는 짓이거니와 식객(食客) 유치(誘致)를 꾀하는 그의 상혼(商魂)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