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을 같이하는 종족이 일정한 지역에서 조선(祖先) 대대로 살아 거기에 선영(先瑩)이 있고, 부모 형제 자매와 더불어 살아온 곳을 고향이라 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같은 씨족 중에서도 별도로 지역을 옮겨 가 자손을 남기고 살아가면 입향조(入鄕祖)가 되고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갔다.
수인사(修人事) 통성명(通姓名)을 하고 나면, 관향(貫鄕)이 어딘가를 반드시 물어 고향의 뿌리를 확인하곤 했던 것이 우리네 전통적인 고향 의식이었다.
농경을 주된 생활 수단으로 하여 일정한 고장에 정착하여 살던 시기의 일이지만 20세기 아니 작금에도 고향에 대한 인식은 우리들 가슴 속에 뿌리깊이 내려져 있다.
고향은 숙명으로 얽힌 인연의 고장이라 잊을 수가 없고 떠나와 있으면 그립고 가고 싶고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도 있고,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 월조소남지(越鳥巢南枝)'라는 고시(古詩)도 있다. 미물(微物)도 제가 태어난 곳을 잊지 않으니 사람에 있어서이랴 여북하겠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곳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구름도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얼룩빼기 황소가 울음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고 노랫말에서도 향수에 젖는 것이 고향이다.
고향은 잊을 수 없는 곳, 그리움에 지쳐 눈물겨운 곳,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개념 지워진다.
그런데 정녕 오늘의 이 시대에 고향은 있는 것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가 궁금하다. 가보지도 못한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을 자기의 고향이라고 해야겠지만 추억이 없으니 정이나 향수가 있을 수 없고, 관향(貫鄕)까지 물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빌딩의 숲, 공동주택이 즐비한 도회의 여항(閭巷)을 고향이라고 말하기는 무언가 어색해 고향의 개념을 바꾸어 가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젊은 세대가 고향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가슴에 묻어둘 것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지만, 기성의 세대에서는 잃어가는 고향을 지켜줄 책무가 과제로 남는다.
고향! 그것도 농어촌 산간 벽지의 고향은 현대문명의 특징인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의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생업의 기반마저 흔들려 인구가 급감하고 향촌사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존립의 위기에 내물리고 있다.
산간벽지에 있는 내 고향 안의는 동계(棟溪) 정온(鄭蘊)의 고향이며 예로부터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사람들의 기질이 강한쟁투(强悍爭鬪)했던 곳, 무신란(戊申亂)에서는 역적의 고장으로 찍혀 폐읍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현감으로 있으면서 실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다듬어진 고장.
1946년 조선무정부주의자 동맹을 결성시켜 한국 아니키즘 운동의 본산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 아나키즘 운동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용납되지 못했지만 학문의 한 분야로는 남아 있어 언젠가 또다시 정치적인 세력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중의 하나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직후 성급한 중고등학교의 창립이다. 면단위 행정구역에 공립중고등학교를 신설해 주지 않으니 향토를 사랑하는 선각자, 선진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사학(私學)으로서의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해방 후 국내 사립중학교 설립 1호다. 군정시기와 6.25 전쟁 당시의 혼란기에 지식인을 모여들게 하고 후진을 가르쳐 인재를 배출했던 것이다. 청마 유치환이 교장으로 이 고장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그 시절의 일이다.
그 당시로서는 산간벽지에 사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동량재(棟樑材)를 길러낸 장한 일이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면단위 행정구역으로 취학 인구가 급감하였으니 재정이 취약한 사학(私學)으로서는 존속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시류(時流)가 낳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립으로서의 전환을 서두르지 못한 업보이기도 하지만 편향된 애향심과 그릇된 아집(我執)이 빚은 참사가 아니겠는가.
'고향에 살고 있는가?' '고향을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고향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고향에 대한 애착은 강한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자주 이런 화두(話頭)를 던진다.
세상살이가 변하여 모두 고향을 떠나 살고 있으니 자칫 고향을 잊고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일생을 통하여 생업을 따라 살다가 보면 제2의 고향, 제3의 고향도 있을 수 있고,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하는 고향체념론자도 생겨나게 된다. 그렇더라도 고향은 언제나 마음의 고향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고향 전경(全景)의 대형 사진과 동향(同鄕) 선배 화가의 오래된 고향풍경 유화를 벽면에 걸어두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향수를 달랜다.
고향에 살면서 고향을 팔아먹는 사람들을 원망함으로써 애향심을 자가발전(自家發電)하는 버릇도 있다.
무지(無知)나 정치적, 상업적 안목으로 문화유적을 잘못 복원하거나 오도(誤導)하고 과장(誇張)하는 자칭 향토사학자, 문화애호가를 경멸한다.
향토에서, 도회에서, 해외에서 많고 적은 자본을 고향을 위해 투척하는 인사의 애향심에 머리가 숙여진다.
후미진 산골에서 염소를 길러 팔아 평생을 모아둔 돈 1억원을 향토의 고등학교에 기부한 미담의 주인공, 염소할머니의 고장이 내고장 안의(安義)이다.
지난 5월 어느 날, 나는 안의고등학교 정기총동창회 모임이 모교 강당에서 있어 참석하였다. 어떤 모임에 앞장 서 나서거나 책임을 맡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데 오랜만에 파격적인 결행을 한 셈이다. 노인성고독증후군인지 모르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떠밀려서인 것이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모교는 내가 공립학교 교사 발령 대기를 하면서 6개월간 교사로 재직했던 고등학교여서 나의 교직생활의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문학박사에 대학 교수이고 학장 보임 경력이면 요만한 모임에서 대단한 인물이다 싶었는데,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탄탄한 경륜과 업적을 쌓은 선후배가 많아 기가 꺾이기도 했지만, 나보다 훌륭한 내 고향 동창생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고향에서 살고 있는가? 노!
고향을 사랑하는가? 예스!
고향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아이 돈 노우!
흥겨운 노랫소리로 떠들썩한 귀경(歸京)하는 차중에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재산이 없으니 돈을 기부할 수는 없고, 내 전공영역에서 평생을 모아둔 인문사회과학분야 서적이나마 모교 도서관에 기증을 할까?
고향은 어머니 품속 같은 곳,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그것은 고향을 잃은자의 궤변(詭辯)이요 자학(自虐)이다.
죽어서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2017. 7 .30. <길 20호>. 여강 김재환)
'여강의 글A(창작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知人의 무덤 (0) | 2017.09.27 |
---|---|
잔치의 표상 생일잔치 (0) | 2017.09.13 |
어미닭의 새끼 사랑 (0) | 2017.03.13 |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0) | 2017.01.17 |
연적(硯滴) 추상(追想) (0) | 2016.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