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愛......
自愛와, 人間의 '自我'의 本性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人間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對象이 결함과 悲慘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는 偉大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자기가 微少함을 안다. 幸福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自己가 悲慘한 것을 안다. 完全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自己가 不完全에 차 있음을 안다.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의 對象이 되기를 원하면서 自己의 결함이 사람들의 嫌惡의 侮蔑感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안다. 그가 느끼는 이 錯綜은 그가 想像할 수 있는 가장 不正한 가장 罪많은 情念을 그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는 自己를 責하고 자기의 결함을 自覺시키는 이 진실에 대하여 철저한 증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이 眞實을 絶滅 시키려 하지만 眞實 그 自體를 破壞할 수 없기 때문에 自己의 意識과 남의 意識 속에서 될 수 있는 데까지 그것을 파괴한다. 까닭인즉 자기의 결함은 他人에게도 自身에게도 감추기 爲해서 全力을 다하고 그 결함이 他人으로부터 指摘 當하거나 남에게 간파되는 것을 견디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함에 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惡이다. 허나 결함에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認定하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더 큰 惡이다. 그것은 故意的인 환상을 錯覺 위에다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속이는 것을 願하지 않는다. 또 남들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尊敬을 우리로부터 기대하는 것도 정당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남들이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惡德을 폭로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조금도 잘못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런 惡德이나 缺點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결점을 모르고 있었다는 一種의 惡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결함을 알고 우리를 蔑視한다 해서 우리가 성을 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알고 있으며 만약 우리가 멸시를 당해 마땅한데 멸시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公平과 正義에 充滿된 마음에서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 그와 正反對인 傾向이 엿보인다 하면 우리는 그에 對해서 무엇이라 말해야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眞實을 미워하며 또 眞實을 말하는 것도 미워하고 남들이 우리의 편을 들어 적당히 우리 自身을 欺瞞해 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로 있는 그대로와는 달리 남들로부터 評價를 받기를 願하는 것은 事實이 아닌가?
여기 나를 두렵게 하는 하나의 證據가 있다. 카도릭敎는 우리의 罪를 누구에게나 無差別하게 告白시키려 하지는 않는다.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 두는 것을 허용하지만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은 마음의 바닥을 열어놓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명령한다.
이 宗敎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그이가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이에게는 굳이 비밀을 지키도록 하고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체 하도록 한다. 이보다 더 慈愛롭고 이보다 더 너그러운 방법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腐敗는 혹심하고 이런 규칙조차 너무나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유럽의 대부분으로 하여금 敎會에 반역하도록 한 主要한 理由 中의 하나다. <1961년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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