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29)

如岡園 2021. 2. 22. 21:58

헤밍웨이의 遺稿 , <隨想錄> 중에서

 

     努力과 時間에 對하여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서 사람은 누구나 파일롯트가 된다. 그러나 그늘이 없는 온통 환한 양지나 고통이 없는 온통 기쁨 뿐인 곳에서는 결코 생명이 없다. 마구 뒤엉킨 실마리를 많이 가지라. 차례로 닥아오는 불행과 축복은 우리를 차례로 슬프고 행복하게 해준다. 죽음까지도 삶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다. 人間은 死別과 悲哀의 그늘 아래서 구슬픈 순간에 참된 자기 자신으로 닥아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위대한 傑作을 썼다고 하면 大衆의 관찰력은 우리에게 난관을 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늘에서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抵抗力을 시험한다. 인물은 失敗를 끄집어 낸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연구하고 시험하며 몇 번이고 우리가 입은 상처에 대해 自身의 재능을 과대평가해 보고 난 뒤에 비로소 그러한 경험이 우리 자신의 强弱点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의 과실을 후회하는 것이 참된 후회이다. 제압할 만큼 고상한 것이란 없다. 참된 高尙함이란 자기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다.

 

 知慧란 성숙한 마음에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시간을 자기의 협조자로 만드는 것을 배운다. 시간은 美容師로, 慰撫者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敎師이기도 하다. 시간은 경험의 양식이며 지혜의 토양이다. 시간은 젊은이의 벗, 아니면 敵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노인 곁에 앉아서 그 노인이 시간을 쓸모있게 보냈는가 못했는가에 따라, 그리고 흘러보낸 과거가 좋았던가 나빴던가에 따라 慰撫者가 되기도 하고 고통을 가해주는 者가 되기도 한다.

人生이란 그것이 무엇인지 채 알기 전에 거의 다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존재는 단순한 기간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크 나무는 다른 생물들이 수없이 거쳐가는 동안 몇 세기를 살아 남는다. 그러나 어느 누가 생활하며 깨닫고 思索하는 인간의 단 하루의 존재를 그 나무와 바꾸려고 하겠는가?

 

 人生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좀 더 깊이 吟味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 할 정도로 많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人生을 다음 네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人生을 즐겁게 보냈다>고. 

 

     죽음과 공포에 대하여

 

 내 일생에 가장 보람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 작품이 바로 <노인과 바다>였다. 이 작품은 많은 난관 속에 이루어졌다. 나는 차츰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늙음으로 죽은 사람은 드문 것이다. 대개가 실망이나 정렬적인 정신노동 또는 육체노동 아니면 사고로 죽는 것이다. 人間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다. 生涯가 길면 가끔 樂觀主義는 빼앗겨 버리는 수가 있다. 생애가 짧은 것이 더 좋다.

 

 자기 生涯에서 흔히 사람들이 죽을 때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고통을 한 두 번씩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죽음의 고통이란 어느 의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齒痛 만큼도 안아플 것이라고 한다.

 

 모두가 싸움터로 나가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비겁한 자는 헛되이 죽는다. 나는 늘 인간의 첫째 의무는 공포를 이기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위험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 만큼 사람을 약하게 하는 것은 없다. 平坦한 과정은 얻기 어려운 난관을 초래한다. 人間은 가끔 진상을 알아내기가 두려워 공연히 쓸데없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수가 많다. 공포 자체보다는 진상을 알아내기를 두려워하는 공포 때문에 그들은 진상보다도 나쁜 것을 두려워하기가 일쑤다. 그들은 유령이라도 본 듯이 생각하며 그러한 망상 속에서 人生을 비참하게 보내는 것이다. 차라리 惡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한 週를 살아가기보다는 惡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