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어의 눈물
세익스피어의 <헨리 6세>, <오델로>, <안토니와 크레오파트라> 등을 떠들어 보면 '악어의 눈물'이란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문헌 <바스렛>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만약 악어가 물가에서 사람을 발견한다면 가능한 이를 죽이고, 그 후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잡아 먹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이 귀절에서 借用해서 썼다는 설이 있다. '악어의 눈물'이란, 말하자면 거짓 눈물을 뜻하며 그 악어는 위선의 상징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악어의 논법'이란 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나일강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악어가 잡아갔다. 그의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자식을 돌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때 악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이를 돌려주겠는가. 안돌려 주겠는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아이를 돌려 주마!"
물론 악어는 아이를 돌려 줄 생각이 당초에 없었다. 만약 아이의 아버지가 '돌려 주겠지요' 하면 '틀렸다.' 하고 아이를 잡아먹을 심산이었으며, '돌려주시지 않겠지요' 한다면, '돌려 줄 작정이었는데.' 하고, 결국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악어의 논법"이란 것은 우리 속담의,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거리'와 맞먹는 말이다. 궤변이다.
누구나 다 악어의 교활성을 얄미워하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반성의 조건으로 삼는다면, 우리들이 평소에 들먹대는 논리란 것도 기실은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하하기 위한 억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악어가 이토록 혹평을 받게 된 것은 그 추하고 고약한 일면이었지만 한편 악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그 '눈물'이나 그 '논법'이 위선적이라고 노발대발할 일이 아닌가.
# 스파르타 敎育
스파르타교육이라 하면 보통 아이들을 엄하게 기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교육제도에서 비롯된 말이다.
도리아인이 만든 스파르타는 이오니아인의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대표적 도시국가였지만 그 사회적 경제적 성격은 매우 달랐다. 일반적으로 아테네는 상업이 발달됐고 개방적 문화적이었다. 거꾸로 스파르타는 농업 본위이었고 폐쇄적 군사적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원인으로서는 물론 지리적 조건이 크게 작용된 것이었지만 또 한가지, 양쪽의 노예제도가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즉 아테네의 노예는 주로 외지에서 팔려온 이민족이며, 노예들 사이의 연대의식은 부족했지만 복종성은 강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노예는 도리아인이 남하함으로써 정복된 先住民 혜로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수인 스파르타 시민은 항상 힘에 의하여 그들을 억압해 두어야만 했었다.
스파르타 사회의 폐쇄적이며 무단적인 성격을 제도화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엽의 입법가 류크르고스였다. <영웅전>의 작가 쿠루타루코스(로마의 史家)는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먼저 류쿠르고스는 원로원 제도를 만들었고, 중요한 사건은 왕과 대등한 표결권을 주어서 '살에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운 왕의 지배권'을 적당히 냉각시켰으며, 사회의 안전과 중립성을 가져왔다.
둘째의 개혁은 좀 더 과격했다. 토지의 소유가 치우쳐져 있는 것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하여 빈부의 차를 없애려했다.
세번째의 정책, 게으름과 사치를 없애는 공동회식제를 채용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에서 탐욕스런 동물처럼 하인이 만들어 주는 요리를 배불리 먹고, 지나친 수면과 따뜻한 목욕과 그리고 충분한 휴식을 갖고 포만과 욕망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이 제도가 철저히 실시되자, 간소하고 공통된 음식을 규칙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 회식에는 어린이들도 어버이를 따라 출석했다. 그리하여 석상에서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자유민으로서의 행동을 배웠다.
그리고 도시국가의 당국자는 이따금 젊은이들 가운데서 가장 유능한 자를 골라 단검과 식량을 주었고 일정한 목적 없이 지방에 파견하는 수도 있었다.
이들 젊은이는 낮이면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겨 휴식을 취했고, 밤이 되면 거리로 나와 헤로드를 죽였다.
또 스파르타의 고관인 에로포이의 직에 임명된 자는 취임 직후 헤로드에게 싸움을 걸어 살륙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스파르타인은 헤로드를 가혹하게 다루었다. 스파르타 만큼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를 심하게 규정한 나라는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 말은 스파르타 사회의 특색을 잘 드르내고 있다.
스파르타에서는 류쿠르코스 제도에 의하여 토지를 가지는 자유시민 사이의 평등이 확보되었고, 그 경제적 사회적 토대 위에 중무장을 갖춘 보병전투집단 파랑쿠스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페로포네소스반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시민이 정치와 군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은 헤로드를 그만큼 탄압한 덕분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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